매운 고추의 대명사로 알려진 청양고추는 1983년 중앙종묘가 개발한 품종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국내의 대표적 고추 산지인 경북 청송과 영양의 앞 글자를 딴 청양고추는 신토불이(身土不二) 먹거리의 대표주자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청양고추는 토종과 외국종이 반반씩 섞인 혼혈이다. 아버지 쪽은 베트남 고추를, 어머니 쪽은 제주 재래종 고추를 계통선발해 우수한 양친(兩親) 종자를 키워냈다. 이로써 내병성(耐病性)이 강한 베트남 고추의 매운 맛과 제주종의 아삭거리는 맛을 모두 갖춘 명품 교잡종(交雜種ㆍ성질이 다른 것끼리 교배해 새롭게 태어난 품종)이 태어날 수 있었다.
현재의 청양고추 종자는 국적 불명의 상품이라 할 수밖에 없다. 토종 종자회사였던 중앙종묘가 IMF 당시인 1998년 멕시코 종자회사인 세미니스(Seminis)에 인수합병됐고, 세미니스는 2005년 1월 미국의 거대 종자회사인 몬산토(Monsanto)에 다시 인수합병됐다. 더욱이 현재 청양고추 종자를 생산, 판매하는 세미니스코리아가 청양고추 종자를 중국 산둥성에서 채종(採種ㆍ씨 만들기)한다는 사실에 이르면 청양고추의 국적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우리 농부들이 우리 땅에 씨를 뿌려 키우긴 하지만 청양고추의 족보에서 토종이라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사례는 국경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종자 비즈니스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먹을거리의 원천이 되는 종자 산업에서 국적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돼 가고 있다. 우리 식탁에 올려지는 먹을거리가 외국 종자회사에 점령되고 있다는 뉴스에 신토불이와 국수주의(國粹主義)를 앞세워 흥분할 일만도 아니다. 2025년 세계 인구가 85억명에 이를 경우 식량이 현재보다 50% 더 필요할 것이라는 견해를 감안하면 열악한 재래종으로는 인류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 재래종에 기술과 자본이 투여돼 우수한 종자로 거듭나야 경쟁력이 생긴다.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 자본이 종자 산업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종자 산업은 오랜 육종 기술과 거대 자본을 앞세운 다국적 회사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이들은 미래 종자 산업을 좌우할 유전자 조작(GM) 품종 개발에 전력하는 등 ‘종(種)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세계 종자 업계는 1980년대 후반부터 대대적인 인수 합병 붐에 휩싸이며 거대 다국적 회사들로 급속히 재편돼 왔다.
예컨대 세계 최대 종자회사인 몬산토는 농약회사에서 출발해 인수합병의 붐을 타고 눈덩이처럼 커진 업체다. 몬산토는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데칼브(DeKalb)와 애스그로(Asgrow) 등 곡물 종자 회사들을 왕성하게 인수합병해 나갔고, 2005년 14억달러를 들여 세계 1위의 채소 종자회사인 세미니스를 인수합병했다. 세미니스도 1990년대 후반부터 피토시드(Petoseed) 등 중소 회사들을 인수합병하고 있었다. 당시 세미니스가 인수한 회사의 목록에는 한국 최대 종자회사였던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도 포함돼 있다.
세계적 종자업체들은 지분 구조가 복잡하고 세계적 화학ㆍ제약 회사들이 상당 지분을 갖고 있다. 업계 1위인 몬산토는 미국의 제약회사인 파마시아(pharmacia)가, 2위인 파이오니어(Pioneer)는 거대 화학회사인 듀폰(DuPont)이, 3위인 신젠타(Syngenta)는 스위스의 제약회사인 노바티스(Novartis)가 각각 대주주로 알려져 있다. 거대 화학ㆍ제약업체들이 생명공학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종자 산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몬산토와 파이오니어, 신젠타 등 3대 업체는 현재 210억달러(2005년 기준)에 이르는 세계 종자시장의 31.6%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한 세계 10대 종자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은 49%에 이른다.<표 참조> 몬산토 한 곳만 해도 전 세계 강낭콩 종자의 31%, 매운 고추 종자의 34%, 오이 종자의 38%, 토마토 종자의 23%, 양파 종자의 25%를 점유하고 있다.
국내 종자시장 역시 이들 거대 업체들에 의해 재편이 끝난 상태다. 1998년 세미니스가 1억6689만달러를 들여 국내 시장 1ㆍ2위 업체인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를 인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앞서 1997년에는 신젠타가 3809만달러의 가격으로 서울종묘를 인수했고, 같은 해 일본 종자회사인 사카다(坂田)가 청원종묘를 1047만달러에 인수했다. IMF를 겪으며 자금난에 시달린 국내 5대 종자회사 중 4개가 외국에 넘어간 것이다. 당시 흥농, 중앙, 서울 등 3대 종자회사의 국내 시장 점유율만도 70%에 이르렀다.
당시 외국 종자회사들이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인 것은 시장 규모보다는 한국 종자업체들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한국의 종자회사들을 발판으로 아시아 시장을 공략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흥농종묘 출신인 오영석 세미니스코리아 상무는 “흥농종묘의 경우 인수합병 당시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연간 1000만달러의 종자를 수출했다”며 “일본에는 무, 중국에는 배추, 인도에는 고추 종자가 주로 팔렸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육종 수준을 갖춘 일본 종자회사들의 채종지 역할을 하던 한국은 일본의 기술과 종자를 바탕으로 무, 배추 부문에서는 상당한 경쟁력을 쌓았다. 1970년대부터 일본산에 버금가는 맛의 무, 배추 종자가 나오면서 일본에 역수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또 서양의 싼 종자들이 판을 치면서 재래종 채소의 특성이 사라진 중국에서도 맛있는 한국산 채소 종자들은 경쟁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래종 고추만 판치던 인도 시장은 생산 단가를 낮추고 수확량을 높인 한국산 고추 종자가 거의 석권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세계 시장에서 통하던 한국산 종자의 소유권은 IMF를 거치며 모두 외국 회사에 넘어갔다. 당시 한국 종자 회사들이 갖고 있던 우수 종자 중에는 아직까지 효자 노릇을 하는 대박 상품도 많다. 1984년 흥농종묘가 개발한 ‘금싸라기 참외’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야생종 참외와 일본산 은천(銀泉) 참외, 멜론 등이 교배된 금싸라기 참외는 개발에만 17년이 걸린 품종으로, 국내 참외 종자 시장을 석권하며 20여년간 매년 평균 2억원의 판매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종자 가격이 보통 농가 조수익(순수익에 총비용을 더한 개념)의 2%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금싸라기 참외 종자가 일으킨 부가가치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세미니스코리아 측은 금싸라기 참외와 청양고추, ‘세계 최고의 당도’를 자랑하는 삼복꿀수박(1994년 개발)을 흥농종묘에서 넘어온 3대 대박 종자로 꼽고 있다. 현재 세미니스코리아는 고추, 배추, 무, 오이, 수박 등의 작물을 중심으로 375개의 종자를 판매하고 있는데 2003년부터 본사의 기준과 기술력을 도입해 새롭게 개발한 60여개의 종자를 제외한 나머지가 흥농종묘가 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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