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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자이너가 패션을 결정한다"

여행가/허기성 2006. 11. 20. 06:29



《“미국 패션계는 곧 한국인이 접수합니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값비싼 수입 브랜드의 공세에 밀려 국내 시장에서조차 토종 브랜드들이 맥을 못 추는 실정인데….

하지만 현대백화점의 청바지 캐주얼 담당 노희주 바이어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미국 이민 1세대가 봉제업과 의류 부자재 제조업을 이미 장악했고, 2세대는 디자인계의 최일선에 뛰어드는 형국입니다.

뉴욕의 명문 패션스쿨에서도 한국 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패션 코리아’ 시대가 머지않았습니다. ”》

‘내 식구’ 얘기는 크게 들리는 법이다.


이 때문에 해외의 한류(韓流) 무용담은 과장일 때가 많다. 가수 비가 미국에서 콘서트 한 번 했다고 ‘한국 가요가 미국을 평정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슈퍼 디자이너 한 명이 나왔다고 해서 한국 패션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골프 낭자’의 성공 스토리에서 한국 패션의 밝은 미래를 떠올릴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1988년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에서 구옥희가 첫 우승을 따내고 10년 뒤. 1998년 박세리가 US 오픈에서 맨발 투혼을 불사르며 감동의 우승컵을 안았고 뒤이어 김미현, 박지은, 한희원, 미셸 위 같은 쟁쟁한 골프 여걸들이 나왔다. 선배들의 선전에 자신감을 얻은 후배들의 도전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이젠 골프 유학이 흔한 말이 됐다. 누구도 한국이 골프 강국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패션인들은 한국 패션이 이제 막 ‘1승’을 거두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박세리 같은 ‘거물’이 나오려고 기지개를 펴는 상황이라는 것.

이 같은 청신호는 해외의 캐주얼 시장뿐 아니라 패션계의 ‘메이저리그’로 불리는 럭셔리 업계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 캐주얼, 코리안 파워 업(up)

중견 패션업체에서 일하던 디자이너 문소윤(33) 씨는 2003년 7월 미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넓은 세상’에서 일하고 싶어서였다. 그의 새 근무지는 힙합 캐주얼 브랜드인 ‘사우스폴’. 연 매출액이 3억7000만 달러(약 3300억 원)에 이르는 우량 브랜드다.

미국의 힙합 캐주얼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사우스폴을 만든 사람은 한국인 김대원(51) 사장. 이 브랜드의 디자인과 생산기획 등은 문 씨 같은 ‘토종’ 한국인이나 재미교포들이 도맡는다.

디자인 실장인 문 씨는 “한국 사람은 태생적으로 패션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면서 “타고난 손재주와 스피드, 철저한 소비자 분석력을 갖춰 캐주얼 시장에서 경쟁력이 강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H&M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대등한 경쟁을 펼치는 ‘포에버 21’도 한국인 장도원(50) 사장이 만든 브랜드. 미국 전역에 200여 개의 매장을 내는 등 인기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디자이너 성종현(34) 씨는 고급 캐주얼로 승부수를 띄운 경우. 그의 브랜드 ‘마이너스 성’ 청바지는 한 벌에 250유로(약 30만 원), 티셔츠는 150유로(약 18만 원)이다. DKNY, 아르마니 진과 비슷하거나 더 비쌀 정도다.

그런데도 이탈리아 150여 개, 미국 100여 개, 호주 90여 개의 편집매장에서 팔려나간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자주 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편집매장 ‘프레드 시걸’에도 들어갔다. 한국에는 최근에서야 현대백화점의 청바지 편집매장 ‘데님바’에 제품을 팔며 알려졌다.

“옷 라벨에 젓가락이나 짚신을 달아요. 동양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지요. 주눅들지 않고 자신감 있게 세계를 상대하면 통하기 마련입니다. ”

홍익대 금속공예학과를 졸업한 성 씨는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씨에게 반해 패션계에 입문했다. 파리의상조합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크리스티앙 라크루아 오트 쿠튀르에서 일하며 한국인 특유의 ‘꼼꼼한 손재주’를 뽐냈다고 한다.

글=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세계 패션계에서 주목받는 한국인들

○ 코리안 ‘앙팡 테리블

‘세탁소 지하실의 디자이너, 런웨이를 흔들다. ’

지난해 9월 뉴욕타임스는 부모가 운영하는 세탁소 지하실에서 디자인을 시작한 젊은 디자이너 스토리를 소개했다.

요즘도 아버지에게 자신의 옷을 들고 가 ‘드라이클리닝이 잘 되겠느냐’고 묻는 소박한 디자이너. 그러나 미국 고급백화점인 바니스에서 한 벌에 1500달러나 하는 옷을 팔고, 고객 리스트에 에바 롱고리아 같은 스타들이 즐비한 디자이너다. 주인공은 재미교포 두리 정(33) 씨.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선정한 ‘2006년을 빛낼 유망주’로도 뽑혔다.

역시 재미교포 디자이너인 리처드 채(30) 씨는 20대에 마크 제이콥스와 TSE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낚아채 ‘패션계의 신동’ 소리를 들었다. 2004년 뉴욕 컬렉션에 단독 브랜드로 데뷔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뉴욕타임스가 그의 스토리를 자세히 실었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패션계의 메이저리그에서 ‘앙팡 테리블(무서운 신인)’로 떠오른 것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박고은(34) 씨도 무서운 신인으로 불린다. 샤넬, 조르조 아르마니, 도나 캐런 등 쟁쟁한 브랜드에서 디자인을 하다 지난해 자신의 브랜드 ‘포름 덱스프레션’을 선보였다.

이들 유망주 3인방은 제일모직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신진 디자이너를 후원하기 위해 지난해 설립한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의 첫 수혜자들.

SFDF 사무국 박남영 차장은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유망 디자이너 150여 명이 2기 수혜자가 되고 싶다고 문의를 해왔다”면서 “생각보다 많은 한국계 디자이너가 해외에서 뛰고 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잔뼈가 굵은 토종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가장 화제가 되는 브랜드는 ‘Y&Kei’. 오브제의 강진영(43) 윤한희(43) 부부 디자이너가 만든 이 브랜드는 이미 귀네스 팰트로, 니콜 리치 등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서 인기다. 솔리드 옴므의 우영미(47) 씨도 프랑스 파리의 마레 지구에 단독 매장을 내고 현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 지속적인 투자가 관건

“밀라노에는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한국계 디자이너가 많아요. 정부 차원에서 국내의 우수한 섬유공장과 연결해 주거나 한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등의 다양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디자이너 박고은 씨)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하려면 긴 안목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SFDF처럼 기업이 ‘쓸 만한 재목’을 찾아 후원하는 케이스가 늘어나야죠.”(삼성아트디자인인스티튜트 이명옥 학장)

일본은 1980년대부터 이세이 미야케, 겐조 다카다, 요지 야마모토 씨 등 자국의 패션디자이너를 적극 지원해 ‘일본의 미(美)=동양의 미’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었다. 패션 변방이었던 벨기에도 1980년대 드리스 판 노턴, 발터 베이렌동크 씨 등 ‘앤트워프 식스’로 불리는 디자이너들을 육성해 패션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앤트워프는 일약 패션관광도시로 떠올랐다.

한국도 민간 차원에서는 디자인 인력을 양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제일모직의 SFDF는 매년 해외의 유망 디자이너 3, 4명을 선정해 각각 1억 원가량을 지원한다.

스포츠캐주얼 브랜드인 EXR는 런던 캐너비 스트리트에 3층 규모의 ‘EXR 런던 디자인센터’를 운영 중이다. 자사 디자이너들에게 현지 패션스쿨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해 글로벌 디자이너로 양성하겠다는 것.

EXR 임주용 주임은 “한국 패션은 뛰어난 개인은 있는데 브랜드가 빈약하다는 게 문제”라며 “글로벌 디자이너를 키워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프리미엄 진 돌풍 뒤에도 한국인 손길

프리미엄 진은 한국 소비자에게 널리 알려진 리바이스와 게스 청바지보다 10만 원은 더 비싸다. 가격은 20~50만 원 선.

프리미엄 진이 비싼 이유는 무엇보다 ‘워싱’때문이다. 고급 청바지는 청바지마다 무늬가 조금씩 다르다. 새 것이지만 낡은 듯, 무릎 부분만 물이 빠져 있거나 엉덩이 부분만 색깔이 살짝 다른 식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프리미엄 진은 패리스 힐튼, 제시카 알바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입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모았다. 요즘은 백화점마다 앞 다퉈 프리미엄 진 청바지를 모아 팔고 있다. 그러나 프리미엄 진 돌풍 뒤에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표적인 브랜드는 허드슨 진제임스 진. 허드슨 진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섬유 사업가인 재미교포 피터 김(36) 씨와 30년 경력의 데님 디자이너 로빈 크레티안 씨가 함께 만든 브랜드. 패리스 힐튼이 입어 유명한 제임스 진은 한국 디자이너 임승선(36) 씨가 만들었다.

“세계적인 프리미엄 진 유행의 중심에 한국인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상당수의 고급 브랜드 청바지가 한인 공장에서 생산되죠.”

수입 프리미엄 진 멀티숍을 운영하느 ‘어나더 에디션’조성원 대표의 말이다. LA에서 재미교포 구우율 씨가 운영하는 ‘구스 매뉴팩처링’은 CK진, 바나나 리퍼블릭 등을 제조하는 큰 규모의 봉제업체. 구 씨는 ‘디젤’의 실력파 디자이너를 영입해 ‘AG 진’을 만들고 인기몰이 중이다.

■의류 가방 슈즈 명품 디자이너 알고 보니 한국인

‘명품 디자이너, 알고 보면 한국인?’

약간 과장하면 맞는 말이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부만 맞는 말’이다.

럭셔리 브랜드에서 일하는 한국계 디자이너들이 늘고 있기 때문.

도나 캐런 씨의 세컨드 브랜드 ‘DKNY’의 수석 디자이너 제인 정 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인 정 씨는 캐런 씨의 ‘오른팔’로 불릴 정도로 20년간 캐런 씨의 철학을 디자인에 녹여 왔다.

DKNY와 한국의 인연은 또 있다. 국내 가방제조업체 ‘시몬느’와의 인연이다.

시몬느 박은관 회장은 캐런 씨의 부탁을 받고 DKNY 가방 라인의 든든한 생산기지 역학을 해왔다.

‘사랑스럽다’는 찬사가 절로 나오는 ‘마크 제이콥스’의 슈즈 라인.

슈즈 디자이너인 재미교포 아이린 정 씨의 작품이다.

2004년 단독 브랜드를 낸 리처드 채 씨도 마크 제이콥스의 패션 디자이너 출신이다.

랄프로렌, 토미 힐피거 같은 유명 브랜드에도 한국계 미국인들이 디자인실과 마케팅실 등에 다수 포진해 있다.

프랑스의 자존심 ‘샤넬’의 소재 디자이너도 한국인이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에도 몇몇 한국인 디자이너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계 디자이너들이 늘고 있는 까닭은 명문 패션스쿨의 한국인 비중을 보면 설명이 된다. 미국 패션스쿨 FIT의 재학생 1만 2000여 명 중 한국계 비율은 약 8%, 패션, 재단학과는 3분의 1에 이른다.

미국 명문 패션스쿨인 파슨스를 졸업한 디자이너 최혜정 씨는 “패션학과 재학생의 절반 이상이 한국계였다”면서 “성적도 좋은 편이라 많은 유학생이 인기 디자이너 브랜드의 인턴이나 정규 신입사원으로 취업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