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누군가는 돈에서 찾고 누군가는 사람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바로 스스로가 희망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아니, 충분히 알고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17년 전 두 아들을 떼어놓고 한국행을
택했던 윤애자씨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말한다. 내 안에 희망이 있고 길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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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물씬 묻어나는 12월. 서울의 중심가를 빗겨난 구로구 대림역전. 도로를 달리던 찬바람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몰려와 행인들을 쫓았다. 추위를 피해 모퉁이를 돌아선 그곳에 윤애자씨(49)가 운영하는 ‘윤춘희 구육성’이라는 식당이 있다. 작지만 따뜻한 곳. 70㎡ 남짓한 규모에 10여 개 테이블을 갖춘 이곳은 여느 식당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난 1991년 윤씨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을 당시에는 자신이 이런 식당의 주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얼른 돈 벌어서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길어야 1년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17년이네요.”
남편과 사별한 뒤 중국 흑룡강성에서 여덟 살과 두 살 난 아들을 키우던 윤씨는 두 아들을 위해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한국행에 올랐다. 한참 엄마 손길이 필요한 큰아들과 아직 엄마 얼굴도 잘 모르는 작은아들을 친정어머니에게 떼어놓고 돌아서던 그 길이 윤씨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나중에 엄마 얼굴 못 알아볼까 봐, 내 사진을 조그만 고사리 손에 꼭 쥐어주고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금세 눈물이 차오른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뒤로하고 한국에 도착한 윤씨의 첫 직장은 서울 도봉구 도봉산 입구에 있는 갈빗집이었다.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43만원을 받았어요. 거기서 먹고 자고 했으니까,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한밤중에 눈을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일만 했죠.”
당시만 해도 중국 교포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선은 지금보다 차가웠다. 요즘처럼 식당에서 일하는 중국 교포가 많지도 않던 시절이다. 중국에 살면서 한국말을 쓰고 한인학교도 다녔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도 못한 외래어에 발목이 잡혔다. “한국 식당에서 많이 사용하는 ‘냅킨’ ‘이쑤시개’ ‘쿠킹포일’ 같은 생소한 외래어는 따로 공부를 해야 했어요. 처음 듣는 한국 채소나 요리 이름에도 적응하느라 힘들었죠.” 모르는 것은 공부를 하면 됐고 교포 특유의 억양은 연습해서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갓 젖을 뗀 아들을 맡기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견디기 힘들었다. “일하던 갈빗집에 아이들과 같이 고기 먹으러 온 가족을 보면 우리 아이들 생각이 너무 나는 거예요. 고기를 자르면서도 ‘나는 언제 우리 아이들이랑 이렇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렸어요.”
식당 일만으로는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윤씨는 식당 일을 그만두고 이른바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 현장에 뛰어들었다. “처음 일하던 갈빗집이 도봉산 앞 삼양라면 공장 자리였어요.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공사 현장이 보였는데 슬그머니 나가서 현장 아주머니한테 이것저것 물어봤죠. 그러고는 공사장 일이 더 낫겠다 싶어 바로 현장 일을 시작했어요.” 현장에서 수도꼭지 다는 일부터 지게를 짊어지고 모래를 나르는 일까지 힘이 닿는 대로 일했다. 일당은 3만원. 휴일은 비 오는 날뿐이었다. 그나마도 일을 못하는 날에는 돈을 못 번다는 생각에 비 오는 날이 싫었다. “그때는 중국에서 왔다는 말도 못하고, 우리 어투가 강원도랑 비슷하잖아요.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땐 참 지독하게 일만 했던 것 같아요.”
일할 땐 지독했지만 사람에게는 약했다. 한번은 ‘장비를 구입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현장 소장에게 힘들게 번 돈 1백50만원을 빌려줬다가 못 받을 뻔했다. 천신만고 끝에 돈을 받아내긴 했지만 여간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며 ‘딸 셋 데리고 어렵게 사는 사장이었다’고 얘기한다. 자신도 자식이 있기에 자식 가진 부모 마음을 백 번 이해한다며 윤씨는 미소를 짓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요
그 이후 윤씨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신사동, 서초동, 역삼동 등에서 갈빗집과 횟집을 전전하며 악착같이 일을 했고 그러던 중 1994년 기회가 왔다. 역삼역 근처 프렌차이즈 일식집에서 일을 시작할 때다. 당시 그 가게는 20대 아르바이트생을 서빙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매상이 오르지 않자 전문 서빙 인력을 찾았고 벼룩시장에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간 윤씨는 불법체류 사실을 숨긴 채 구직에 성공했다.
“제가 맨 처음 갔을 때 그 가게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메뉴 가격이 2만5천원이었어요. 홀에 손님이 가장 많았구요. 제가 경력이 있다 보니 실장이 저에게 룸을 맡기더라구요.” 놀랍게도 윤씨가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매출이 2백50만원에서 5백만원으로 올랐다. 고객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손님의 특징을 파악하고 알맞은 메뉴를 권한 결과였다. 윤씨 생각에 룸을 찾는 손님은 비싼 메뉴도 부담을 갖지 않는 손님들이었다.
기존에 많이 팔리던 싼 메뉴 대신 4만5천원짜리 메뉴를 권한 결과 한 달 만에 매출이 두배로 오른 것이다. 한국에 들어와 성실하게 일하며 얻은 노하우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윤씨의 활약이 알려지자 본사에서 전무가 찾아와 ‘윤 주임님, 윤 주임님’하며 깍듯이 대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역 인근에 있는 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건강상의 문제로 열 달 만에 일을 그만둬야 했지만 윤씨에게는 식당 운영의 노하우를 익힌 값진 시간이었다.
건강이 안 좋아진 건 그간의 고생 때문이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 정도로 온몸의 관절과 근육이 아팠다. 그렇다고 일을 쉴 수는 없었다. 아픈 와중에도 일을 하며 병원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때는 정말 집에 가고 싶었어요. 근데 여기서 포기하면 애들 공부는 어떻게 시키나 걱정되더라구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했죠.”
윤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1996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해 아이들이 있는 집, 흑룡강성 목단시에 갈 수 있었다. “아홉 살짜리 둘째가 엄마를 못 알아보는 거예요. 껴안고 펑펑 울었어요.” 그렇게 1996년의 추석은 재회의 기쁨으로 채울 수 있었다. 가족을 만나고 나니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후에는 거의 매년 보러 갔어요. 같이 쇼핑도 하고, 식당에서 고기를 먹으며 소원을 풀었죠. 아들 둘의 팔짱을 끼고 다닐 때는 정말 천하를 다 얻은 것 같더라구요.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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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가 처음 식당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강남 신사동에 있는 갈빗집에서 일하면서다. “그때 호칭이 ‘중국 언니’였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주방장까지 한 식구처럼 재미있게 일했죠. 그때부터 크지는 않더라도 아기자기하게 꾸려나갈 수 있는 가게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찾아왔던 손님들도 기억에 남는다. 북에서 오신 실향민 할머니들의 계모임이 있었는데 말씨가 비슷했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가게에 올 때면 꼭 윤씨를 찾았다. 먼 데서 와서 고생한다며 항상 떡이랑 과일 등을 한가득 안겨주셨다.
언젠가는 꼭 식당을 차려 손님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려야겠다는 윤씨의 바람은 2001년도 서울 구로구 가리봉 시장에 식당을 차리면서 이루어졌다. 테이블이 4개뿐인 작은 가게였지만 윤씨는 개의치 않았다. “식당 설거지 일로 시작한 제가 10년 만에 제 가게를 열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죠.” 식당 밖에 주방을 걸고 천막을 쳐 장사하기에 많이 불편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동안 일하면서 배운 노하우와 몸에 밴 성실함으로 2002년 5월에는 지금의 식당으로 확장 이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친정어머니도 오셔서 같이 살고 있고 오빠와 여동생 둘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고 있다. 무엇보다 어릴 때 사랑을 못 줘 늘 미안하고 가슴 아팠던 둘째 아들이 함께 있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외할머니 손에 자랐지만 정말 그늘 없이 착하게 컸어요. 내 아들이라 그렇겠지만 너무 예뻐요. 작년 여름에는 아르바이트로 현장 일도 했어요. 여기 와서 일하면서 일하는 게 정말 힘들다고 느꼈대요. 저한테 ‘엄마 그동안 고생 많으셨죠. 공부 열심히 해서 제가 호강시켜드릴게요’ 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구요. 내가 이 먼 곳에 와서 고생한 게 헛되지 않았구나. 앞으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간의 고생이 다 잊혀지더라구요.”
“베푼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다시 돌아와요”
그렇게 윤씨는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성공의 비결을 물으니 얼굴을 붉힌다. “제가 뭐 잘난 게 있다구요. 그저 항상 손님에게 친절했던 것밖에 없어요. 인사 밝게 하고 식당에 와서 편안하게 식사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성실함, 그리고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긍정적인 마인드가 윤씨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한 성격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윤씨의 얼굴에도 드러난다. 그리고 또 하나, 나눔의 기쁨. 윤씨의 소식이 전해지며 윤씨를 찾는 중국 교포들이 늘었다. “처음 한국에 오신 분들은 무척 힘들어하세요. 저도 처음 1년은 집 생각에, 자식 생각에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분들에게 딱 1년만 참으라고 얘기해요. 1년만 참으면 중국에 다시 들어가라고 해도 안 갈 거라고.”
일자리 없고 집 없는 동포들은 집에 데려와 재우고 입혀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윤씨의 인정이다. 쉬는 날에는 같이 일자리도 구하러 다닌다. 손님 가족들 중에도 누가 아프다 하면 우리 가족이 아픈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매주 오시는 단골손님이 계신데, 그분 부인이 많이 아프셔서 댁에 혼자 계셨어요. 댁이 가게와 멀지 않아서 모시고 와 같이 밥도 먹고 병원에 음식해서 보내고, 그렇게 4년 동안 정을 쌓았어요.
부인은 결국 돌아가셨지만 가끔 오실 때마다 고맙다고 하세요. 베푼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다시 돌아와요.” 설날에도 ‘윤춘희 구육성’은 문을 닫지 않는다. 명절이라도 집에 갈 수 없는 교포들이 고향 음식을 먹으러 오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더 바쁜 설날을 보낼 것 같지만 그래도 지금은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
새해에는 메뉴도 새로 개발할 계획이다. 손님의 70%가 중국 교포이다 보니 메뉴도 중국성이 강했는데 한국 분들이 오셔서 부담 없이 드실 수 있게 쇠고기 샤브샤브를 추가할 계획이다.
“17년 동안 고생한 걸 어떻게 다 말하겠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고생한 건 금방 잊어버려요. 앞날을 바라보며 살아야지요.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요. 지금은 너나없이 모두 힘들잖아요. 힘들다고 비관하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 힘내서 이 고비를 넘기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저도 힘들 때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낫겠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더니 여기까지 왔네요. 희망이 없으면 살 의욕도 없어지잖아요. 생각하는 대로 돼요. 스스로에게 기회와 용기를 주세요.”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극적인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거지 일부터 시작해 식당 사장이 되기까지, 윤씨의 이야기는 드라마 같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언제라도 자신 안의 희망에 웃을 수 있었기에. 그녀 인생의 모든 인과는 그저 마땅히 따라야 할 잔잔한 감동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촌스런 격언은 역시나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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