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가 지으려한 이어도기지, 멍청한 YS는?
중국이 이어도 상공을 포함한 지역을 방공식별구역(CADIZ)로 발표하면서
갑자기 이어도과학기지가 국제적인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
중국 발표 이후 대한민국은 일방적인 방공식별구역에 반발해
새로운 방공식별구역(KADIZ)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그동안 포함되지 않았던 이어도 상공이 추가로 들어갔다.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이어도 상공을 대한민국 방공식별구역으로 포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400평도 안되는 조그만 과학기지로만 알려졌던 이어도가
갑자기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어도과학기지는 과학자들의 집념과 노력과 열정의 산물로 태어났다.
이 기지를 태어나게 한 인물은,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초대 과기처장관을 지낸
김시중 박사(81·과학기술포럼 이사장)이다.
과학기술계의 원로학자로 또 열정적인 과학기술행정가로
오랫동안 활약해온 김시중 박사는
아직도 펄펄 끓는 열정과 건강으로 인터뷰 내내 건재를 과시했다.
김시중 장관은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 비용으로 지을 뻔 하다가,
이건희 회장과 YS사이가 틀어지면서
10년 뒤 노무현 대통령 때 국가예산으로 완성됐다”고
말했다.
김시중 장관이 이어도과학기지 건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93년 4월 중순 해양연구소 초도 순시하면서
업무보고를 받았을 때였다.
당시 이동영 책임연구원은
“1986년에 해양연구소가
KBS와 함께 이어도 주변 생태계를 조사했는데,
완벽하게 조사가 안돼서
추가로 조사하도록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기상관측 과학기지라도 세워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요구했다.
이때 김시중 장관은 미국 유학시절을 떠올렸다.
학회 참석차 뉴욕 옆 대서양 연안을 갔는데
사람들이 바다에 폴대를 세워놓고 다이빙을 하면서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기상관측기구로만 좁게 생각할 게 아니라
더 연구해야겠다면서 조사를 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파랑도로 이름붙이고 해군기지를 만들려던 사실]도 알아냈다.
이어도 대신
일본의 나까소네 수상은
동경에서 2,400km 떨어진 수면높이 70cm 되는 오키노도리시마 섬에
반경 25m 높이 3m 인공섬을 300억엔 들여 만들었다.
이 섬을 기점으로 배타적 경제수역(EEZ)를 긋다보니
43만㎢(일본 영토의 1.15배)의 바다가 추가로 편입됐다.
과학기지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굳힌 김시중 장관은
국제 분쟁을 우려해서 유엔해양심판관인 고대 박춘호교수에게 전화걸어
“국제해양법에 걸리지 않는지 외국인 전문가하고 논의해달라”고 부탁했다.
보름 뒤 박교수가
“유엔은 암초위에 등대구조물 세우는 것을 기대하고 권장한다”고
답변을 해옴에 따라,
구체적인 계획수립이 시작됐다.
다시 외무부-내무부-국방부 등 8개부처에
해양과학기지의 활용도가 있느냐 물어봤더니
모두 다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가사업으로 해아겠다는 생각을 굳힌 김시중 장관은
정재석 부총리(1993~1994)에게 찾아갔다.
신이 나서 설명하고 나서 예산을 달라는 김시중 장관을 물끄러미 처다보던
정 부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기술이나 열심히 하세요.
돈도 없고
국토넓히려는 생각하지 말고.”
순수한 과학자였던 김시중 장관은,
그때 처음으로 “아, 우리나라 국토가 넓어지는구나”고 생각했단다.
그래도 김시중 장관은,
해양연구소에 계획수립을 지시했다.
흥분한 연구원들이,
360평-550평 규모의 2가지 안에 건설비 126억원짜리 계획서를 들고 왔다.
이 안을 들고 다시 정 부총리를 찾아갔으나,
역시 예산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김시중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고려대학교 체육위원장 자격으로 괌전지훈련가서 보았던
잠수함여행코스가 생각이 났다.
그게 관광객을 끌어들였던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 얘기를 던지니 정 부총리는 마지못해 ,
"그러면 관광회사에 얘기해서,
관광지코스를 개발하고 20년 기부체납하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이어도까지 가려면 헬기로 제주에서 40분을 걸리므로
헬기사업하는 관광회사 관계자를 불러
“잠수함 관광기지 만들고 기부체납하시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지만,
보름 뒤에 거절당했다.
그래도 꼭 필요한 시설이라는 생각에,
김시중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화가 나서 다시 삼성관광 불러 똑 같은 이야기했더니
20일 뒤에 역시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이렇게 무산되나 싶었다.
그런데 94년 9월,
삼성중공업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삼성중공업이 맡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이건희 회장이었다.
그 해 여름 이건희 회장이 독일갔다 와서 업무보고 받는데
삼성관광이 그 업무보고 하니까,
이건희 회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왜 개인일이냐?
삼성관광 가지고 안되니
삼성중공업 사장 가서 추진시켜라”
흥분과 열정으로 똘똘뭉친 해양연구소 연구원들은
밤잠을 설치면서 한 번도 안 해본 해양과학기지 설계에 매달렸다.
당시 이 일의 실무를 맡았던
심재설(沈載卨) 박사(56 ·해양과학기술원 특성화연구본부장/연안재해재난연구센터장 )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중공업 사람들과 수없이 만나
협력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어요.
삼성이 세워주고, 기
지에 삼성로고를 붙이는 데까지 논의가 진척됐죠.
양해각서 내용도 조율을 마치고,
이제 한 번만 더 만나고 나서,
연구원장과 삼성중공업 사장 사이에 사인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삼성과 청와대가 강력한 난기류에 빠져들어갔다.
당시 삼성과 YS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원인을
이건희 삼성회장의 베이징 발언으로 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베이징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경제는 2류"라는 취지로
국내정치를 비판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청와대에서 중단 지시가 내려왔다.
이건희가 지을 뻔 하던 이어도 과학기지는
결국 10년 뒤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 임기때 완공됐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홰보면,
당시 이건희 회장의 발언은 하나도 틀린게 없어 보인다.
이어도 해양기지를 삼성중공업으로 하여금 짓도록 하겠다는
이건희 회장의 판단 역시 YS보다 한 수 위였던게 틀림 없다.
머리에 든게 별로 없는 YS로서는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뭔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YS가,
당시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건에 관심을 갖고 본인이 앞장 섰더라면,
IMF를 초래한 대통령이란 [불명예]와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구축이란 [명예]가
그에 대한 평가에 균형을 맞춰 주었을 것이다.
김시중 장관은 94년 12월말에 퇴임했지만
이어도 과학기지만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김시중 장관은 기회있을 때 마다
역대 과기처장관에게 이어도해양기지 계획을 양성화해야 한다며
계속 건의했다.
YS에 이어 집권한 DJ 역시 혜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DJ정권 내내 이어도 프로젝트는 지지부진.
그러는 사이 96년에 해양수산부가 생겼다.
그러자 해양연구소를 과기처에서 해양수산부로 이관하는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이어도 프로젝트는 또 늦어졌다.
“참 답답하고 분통이 터질 일이죠.
나는 이것을 꼭 해야겠다 싶었어요.
계속 연구해보니 꼭 가져야 할 귀중한 섬이에요.
어자원도 많고 지하자원도 풍부하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이러다간 진짜 안되겠다 싶었는데,
마침 해수부 장관으로 김호식 장관이 임명됐어요.
이 분이 나처럼 논산출신이어서 잘 알아요.
나는 그때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장이라
과총회장 직책으로 장관 면담을 신청했어요.
후배 장관실 찾아가는게 쉽지 않은 거에요.
밖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을 아니다 하면서 기획관리실장 동석시켰어요.
이거 안되면 과학기술계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잖아요.
노무현 대통령은 해수부 장관도 지냈겠다,
해수부에서 청와대에 이야기하면서 빠르게 진척돼
2003년에 마무리 된 거지요.“
김시중 장관은 이어도에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해양연구소에서 준공식 버튼을 누르는 영광을 가졌다.
김시중 장관은
자기 스스로 이때를 생각하면서 “영광을 가졌지”라고 표현했다.
1994년부터 시작한 일이 온갖 장애와 반대를 뚫고 10년만에 결실을 이뤘으니
이는 분명히 “영광”이라고 표현할 만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별 일 없었으면
이어도과학기지는 1995년에 완성됐을 거에요.
내가 입다물고 있으면 그냥 넘어갔을지 몰라요.
하지만 옳다고 생각해서
장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끝까지 밀어부쳤지.”
당시 실무를 맡아 진행한 심재설 박사는,
이어도기지 건설의 세부 내용을 꿰뚫고 있다.
이어도의 영어 이름은 <소코트라 바위>(Socotra Rock)이다.
영국 상선 <소코트라>가 이 바위에 부딛혀 배바닥이 약간 손상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한때는 <파랑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바닷물이 이 암초에 부딪히면서 강한 파도가 치기때문에
파도를 일으키는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어도라는 이름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이어져 내려왔다.
이청준 소설 <이어도>를 통해서 더 유명해졌다.
심재설박사가 2003년에 과학기지 이름을 지을 때 조사를 해보니
6대4의 비율로 <파랑도> 라는 이름보다 <이어도>를 더 꼽았다.
우리나라 태풍의 40~50%는 이곳을 지나온다.
이어도에 기상관측 장비를 설치해서 태풍의 성격을 파악하면,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학기지는 이어도 섬에서 조금 떨어진 평탄한 곳에 세워야 좋다.
이어도에 의해 물결이 바뀌기 때문에 이어도 바위를 피해 세우는게 좋다.
하지만,
이어도 바위에서 벗어난 곳에 세우면 이어도 기지라고 할 수 있느냐는
정서적인 괴리감이 생긴다.
이 같은 사항을 고려해서 이어도 봉우리에서 700m 떨어진 남쪽
이어도 경계안에 과학기지의 위치를 잡았다.
“기지건설에 들어간 비용은 212억원입니다.
그렇지만 최근 이곳에 쏟아지는 국민적인 관심을 보면
실제 가치는 건설비에다가 동그라미 서너개를 더 붙이고 싶어요.
선견지명이 빛을 크게 빛을 발했죠.
이어도 과학기지가
지금처럼 매스컴을 많이 탈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마 지금 그곳에 기지를 세우려면 절대 못했겠죠.”-심재설박사
이어도 과학기지의 전체무게는 3,000t정도이다.
공사는 현대중공업이 맡아서 했다.
이보다 수십배 되는 해양구조물을 설치한 경험을 가진 현대중공업에게
3,000t짜리는 성냥갑에 불과한 아주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2002년 하부구조물을 설치할 땐 예상보다 2배 시간이 들어갔다.
파도가 잔잔한 9~10월을 공사시기로 잡았지만,
유난히 그해에만 파도가 많이 쳐서
공사에 동원된 바지선 8척 중 한 척이,
상해 앞바다까지 떠내려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상부구조물은 2003년 5월에 설치했다.
5월도 태풍이 거의 없는 시기이지만,
이때도 예상치 않은 강풍이 불면서 제주도로 피항하는 일이 생겼다.
이어도는 바닷속 암초이므로 지반이 매우 단단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달랐다.
마치 초코파이처럼 겉은 약간 단단하지만, 그 아래는 물렁했다.
네덜란드 지반조사 전용선을 동원해서 암반조사를 해보니 1.5m만 암반인데
그나마 콘크리트의 4분의 1 강도에 불과한 응회암이었고
그 아래로는 모래와 뻘을 이뤘다.
다리를 4개만 세우려다가 추가로 4개를 보강해 8개로 늘렸다.
4억원 정도 되는 암반조사를 생략하고
처음 설계대로 4개만 세웠으면 큰 낭패를 볼 뻔 했다.
바닷물 구조물을 세우다 보니 3중으로 부식방지 장치를 만든다.
첫번째로 부식장지 페인트를 두껍게 바르고
두번째로 전기도금으로 알루미늄 합금을 부착하고
세번째는 12㎜의 부식을 허용하는 것이다.
12㎜ 이상은 잘 부식되지 않으므로 아예 부식허용치를 만들어놓았다.
구조물 다리의 파이프 직경은 1.6m나 된다.
제일 두꺼운 곳은 45㎜이다.
심재설박사는 41살에 이 사업을 시작해서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맡아했다.
이어도과학기지를 하면서,
심재설박사는 한번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2001년에 울산 현대중공업 기술진하고 회의를 마치고 저녁먹으러 가는데
배가 너무나 아파서 견딜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급히 안산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병원에 갔더니 포카리스웨트를 먹으면 가라앉을 것라는 처방을 받았으나
4일 동안 통증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다시 고대병원을 갔더니 맹장이 터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맹장이 터진 줄 모르고 4일을 견뎠으니 온 몸은 완전히 감염된 상태.
급히 수술을 하고는
무려 4시간동안 거의 걸레빨듯 내장을 청소해야 했다.
또 한번의 시련은 공사를 마친 뒤 닥쳤다.
2003년 6월 완공하고 잘 가동하는 중이었는데,
3개월뒤인 9월에 태풍 매미가 우리나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내일모레면 매미가 한반도에 상륙하는데
그동안 잘 가동되던 과학기지에서는 기상관측자료가 오질 않았다.
해경에 헬기를 요청했으나 초속 15m가 넘어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10t짜리 배를 빌려 운영위원 4명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7시간이면 도착하는 이어도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운영위원들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오질 않았다.
태풍은 이어도과학기지 500km앞까지 닥친 상황이었다.
일요일, 연구소에서 대원들의 연락을 기다리던 심재설 박사는 초주검이 됐다.
보내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이때처럼 실감나던 때는 없었다.
10시간 만에 연락이 왔다.
과학기지가 가동을 멈춘 것은,
전원공급이 끊겨 시스템이 다운됐기 때문이었다.
배가 파도를 거스르며 가는 바람에 시간이 늦은 데다,
과학기지의 전원이 끊기면서 자동 사다리가 내려오지 않아
대원들은 해적처럼 밧줄을 던져 걸어야 했다.
서툰 솜씨로 수십번에 걸쳐 밧줄을 던져 간신히 올라가서 발전기를 돌렸다.
알고 보니 아주 간단한 운영착오였다.
전원공급장치는 발전기-풍력발전기-태양발전기 3종류가 설치됐지만,
3개월이 지나면 발전기를 다시 돌려야 하는 반자동시스템이었다.
연구소에서 원격으로 발전기를 돌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심재설 박사는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이어도과학기지의 수명은 최소한 50년으로 보고 있다.
심재설 박사는,
한국 중국 일본 미국 과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추진해볼 만 하다는 의견을 낸다.
4개국 과학자들이
이어도기지에서 나온 자료를 분석하고 관측하는 공동연구로 유대감을 형성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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