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항 행사에서 시범을 보이는 북한 미녀응원단의 모습.
북한 만경봉호가 9월 인천에 옵니다. 같은 달 19일 개막할 17회 인천아시안게임 북측 응원단의 숙소로 쓰려는겁니다. 2002년 9월 부산아시안게임 때 288명이 몰려와 남한을 들썩이게한 ‘미녀 응원단’입니다. 북한과의 실무협상(17일)이 타결되진 않았지만 북한은 이번엔 규모를 늘려 350여명정도의 응원단을 보내려 합니다. 개성~파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육로로 남한 땅을 밟겠다는 건데요.이와 별도로 선수단 350명은 평양~인천 서해 직항로를 거치는 고려항공편으로 방문한다니 손님맞이를 위한 육·해·공 입체작전이 펼쳐질 판입니다.
실무 협상 결렬로 일각에선 북측 참가가 불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이는군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할 남자축구 검열경기를 지도했다”고 북한 관영매체가 20일 전했습니다. 이쯤 되면 북한의 참가는 ‘확정’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남측 태도를 빌미로 회담판을 깨고 “참가 재검토” 운운한 북측 대표단은 서둘러 회담장에 돌아올 명분을 만들어야할 곤혹스런 입장일겁니다.
만경봉호는 북일간 해상 교류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원산과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잇는 북·일 간 연락선 역할을 했습니다. 조총련 간부 방북 등에 이용됐고, 일본 물자를 수입하는 통로였죠. 하지만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북제재 차원에서 2006년 발이 묶였습니다. 최근 일본의 일부 제재해제에도 만경봉호는 예외로 남았습니다.
만경봉호가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건 재일동포 북송사업 때문입니다. 북·일간 합의로 1959년12월부터 일본 거주 교포를 북한에 영구 이주시키는 일이 추진됐는데요. 84년7월까지 2만8000세대 9만3339명이 북송선을 탔습니다.
저는 지난주 니가타항을 찾았습니다. 통일부와 한반도미래재단(이사장 구천서)이 주관하는 ‘통일 지도자 아카데미’ 소속 탈북 대학생들의 수학여행에 함께 한 겁니다. 만경봉호가 접안하던 서쪽부두에서 동해를 바라보니 ‘지상낙원’을 꿈꾸며 출항했을 북송교포들의 회한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떠나기전 심었다는 305 그루의 가로수는 일본말 야나기(やなぎ)가 아닌 ‘버드나무길’로 불린다고 합니다.
동행한 탈북 대학생들 중엔 북송교포 부모를 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상검열에 걸린 아버지가 결국 살아서 나올수 없는 수용소에 갇혀버렸다는 신은진(24·가명)양은 “엄마·아빠는 무슨 희망을 안고 만경봉호에 올랐을까요”라며 먹먹해했습니다. ‘째포’(북송교포를 비하하는 말)라 불린 이들은 북한 도착 직후부터 탄압과 감시대상이 됐다고 합니다. 강제로 일본 친척에게 써야했던 북한체제 찬양 편지에 약품·달러를 요청하는 글을 몰래 썼다 들통나 고초를 겪기도했다는 겁니다.
북한으로 통하는 해상 관문인 니가타에는 “다시 만경봉호가 들어온다”는 기대감에 들떠있었습니다. 과거처럼 인적왕래 뿐 아니라 북한이 중고차와 기계류를 수입해가고 고급 사케(일본 전통술)를 사들이는 통로로 이용하면 장사가 될 거란 이유에서랍니다. 한국 영사관 관계자는 “한동안 위축됐던 니가타 조총련도 최근 북·일 관계개선 분위기에 고무돼 기지개를 켜는 분위기”라고 전했습니다.
만경봉(萬景峰)은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는 평양 서쪽 대동강변의 봉우리입니다. 2001년8월 방북한 강정구 교수가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글을 방명록에 남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일이 있을만큼 북한 체제를 상징하는 말이죠.
이번에 인천에 오는 만경봉호는 예전 북송 교포를 태웠던 그 배는 아닙니다. 원래 만경봉호로 불리던 배는 84년 북송사업 중단 후 화물선으로 탈바꿈했다고 합니다. 대신 북한은 ‘만경봉 92호’로 불리는 새 배를 취항시켰죠. 김일성 80회 생일을 맞아 조총련이 당시 40억엔(우리 돈 400억원 정도)의 성금을 모아 선물한겁니다.
12년 전 만경봉호는 부산아시안게임 북한 미녀응원단이 타고와 선풍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경기장은 물론 숙소까지 찾아가려는 일부 남성들의 도를 넘은 구애공세에 경호당국이 진땀을 빼기도 했습니다. 베일에 싸인 선내 생활도 화제가 됐죠. 숙소가 좁아 보조침대를 이용해 잠을 잤다거나 평양 옥류관 냉면 재료를 공수해왔다는 말도 전해졌습니다. 길이 162m에 이르는 만경봉호 4층엔 식당과 영화관·목욕탕까지 갖춰져 있다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일부에선 ‘김정일식 미인계(美人計)에 나라가 들썩인다’는 걱정이 나올 정도였죠. 북한이 대북비판 여론을 누그러뜨리는데 대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첫 남북정상회담 직후라는 점도 분위기를 띄운듯 합니다. 당시 정부는 13억5500만원의 국민세금을 들여 북한 응원단과 선수단의 체류비를 댔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달라보입니다. 정부와 조직위는 국제관례를 들어 북한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북한은 과거처럼 체류비용을 대줬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남측의 ‘관례’와 북측이 주장하는 ‘전례’가 어떻게 추후 협의에서 절충될지 주목됩니다.
육로로 올 응원단 숙소로 쓰겠다며 굳이 만경봉호를 남한 항구에 진입시키려는 북한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천안함 폭침도발에 대응한 우리 정부의 5·24 대북제재 조치를 무력화하려는 꼼수라는 의심도 사고 있습니다.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2003년8월, 303명)와 인천 아시아육상경기(2005년9월,124명)등 역대 3차례와 비교해 최대 규모 응원단 파견해 어떤 광경을 연출할지도 관전 포인트입니다.
“북남사이 관계개선과 불신해소의 계기가 돼야한다”(20일 중앙통신)는 김정은의 말에 진정성이 담겨있길 바라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북한 국방위원회는 21일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비판한 정부에 “청천벽력 같은 보복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위협했습니다. 김정은은 또 “신성한 체육이 불순세력의 정치 농락물이 돼선 안된다”고 했다는데, 이 말의 속뜻이 뭘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