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 니들 속옷만 입고 도망가던 선장이구나"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곧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바람이 거칠어지고 고층건물 사이로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아래 엉성하게 비닐로 덮은 천막이 맥없이 너풀거리고, 노란 리본과 노란 바람개비가 바람 따라 휘청거렸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의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은 먹구름 그림자 아래서 더욱 아득해졌다. 그런 유가족들 곁에서 미동도 않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눈물이 보이십니까?>
<아이들이 끝까지 애타게 불렀을 이름 '엄마,'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커다란 손팻말을 펼쳐들고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엄마들'이었다. 세월호 이전엔 서로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이들이 이심전심 엄마의 마음으로 한데 모인 건, 광화문광장에서 혼자 일인시위를 시작한 한 주부의 사연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혹시 오지숙씨?"
유가족 천막 앞에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답을 한다.
"예. 1시 반까지 좀 기다려주시겠어요?"
흰색 블라우스에 노란 리본을 달고, 신성한 종교의식을 치르듯 그는 약속한 시간까지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오지숙(38)은 4월28일부터 매일 4시간씩 광화문에 나와 일인시위를 벌였다. 6월2일 팽목항 일인시위를 한 뒤 몸져누울 때까지 그의 자발적 고행은 주말을 빼고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시위 2주째부터 알음알음 다른 엄마들이 가세하기 시작했고, 오지숙이 올리는 시위일지를 보고 공감하는 엄마들이 모여서 '리멤버 0416'이란 온라인 그룹도 만들었다. 대표도 회비도 따로 정해진 바 없지만, 서로 빈 날짜를 확인하고 각자 가능한 시간을 정해 광화문을 지킨다. 이제는 오지숙도 그 모임의 일원이 되어 일주일에 한번 어김없이 다른 엄마들과 광장에 선다. 세월호 이후 '앵그리맘'이라 불리는 이들, 그들의 분노와 결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엄마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은 이제 세상 변화의 새로운 주역이 될 수 있을까? 오지숙을 만나, 뜨거운 세상 한복판으로 나선 이 시대 엄마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페이스북 프로필을 보니 '독수리 오남매네 집'이라고 쓰여 있던데, 정말 아이가 다섯인가?
"그렇다. 중1짜리가 큰아들이고 그 아래로 9살, 7살, 5살, 3살. 아들 둘에 딸 셋이다."
-대단하시다.(웃음) 줄줄이 어린아이들이라 한창 손이 많이 갈 땐데.
"막내는 아직도 기저귀 하고 있다.(웃음)"
무작정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비수처럼 박힌 한 어머니 말씀
"없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무력하기만 하던 어린 시절의
어머니 떠올라 광화문에 나갔다
누구는 "당신 정치할 거냐"고
하는데 정치는 정치인만 하나
주권자의 소리 내는 게 정치지
정치가 좀 내려왔음 좋겠다
아, 저는 지금 정치활동 중이다
아들 둘에 딸 셋, 막내는 아직도 기저귀
-이전에 일인시위를 해본 적 있나?
"아니, 전혀 없다. 시위나 집회에 참여해 본 적 없었다."
-가정주부로서 일인시위라는 게 혼자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4월16일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뉴스를 붙잡고 살다시피 하면서 매일 울었다. 낮에 애들 있을 때 울면 애들이 힘들어하니까, 애들 재우고 밤에 혼자 울고…. 그러다가 페이스북에서 유가족 대변인 하시는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하고 친구 맺기를 하게 되었다. 예은이 기다리면서 아빠의 애타는 심정을 페이스북에 올려주셨는데 그분 글을 보면서 진짜 내 조카 기다리듯 예은이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예은이가 올라왔어요. 여전히 예쁘네요' 이렇게 올린 글을 보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장례식장에 달려갔다. 가서 예은이 가족들 보고 한참 울다가 집에 오려고 나서는데 그 옆방에도 단원고 학생 빈소가 있었다. 다음날 발인을 한다는데, 문상객도 없이 어머니 혼자 아들 영정 앞에 앉아 계시는 걸 보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서 조문을 하고 엉엉 울었다. 그랬더니 우리 애 선생님이시냐고, 그래서 저도 우리나라에서 애 키우는 엄만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왔다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고 일어서면서 '너무 안타까워요' 하니, 그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안타깝지만 어쩌겠어요. 또 그렇게 잊혀지겠죠. 늘 그래 왔잖아요. 없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살았어요.'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내 안에 있던 뭔가가 확, 울컥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오지숙의 가슴에 와서 박힌 말. "없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살아왔다."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건실한 남편을 만나 줄줄이 오남매를 키우며 알토란 같은 가정을 꾸렸고, 작년 여름엔 강남구 세곡동의 보금자리주택에 다둥이 특혜로 입주를 해서 내 집을 마련하는 행운도 누렸다. 그러나 그에게도 '없는 사람'의 서러움이 켜켜이 쌓인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있다. 전남 영광에서 상경한 부모는 경기도 성남시 판자촌에 정착을 했고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로 삼남매를 부양했다. 보증금 50에 6만원짜리 월세방에 살던 어느 겨울, 집주인은 새로 건물을 올리겠다며 방을 비우라 했는데 그 돈으론 다섯 식구 옮겨 갈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종일 방을 보러 다니다 돌아온 어머니는 구석에서 숨죽여 울고 계시고, 말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던 아버지…. 그때 어린 지숙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무력감을 다시 맞닥뜨리는 건 끔찍했다. 오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빈소의 어머니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이번엔 가만있지 않을게요. 제가 뭐라도 할게요. 안되면 광화문 네거리에 나가 피켓이라도 들고 있을게요."
-앞뒤 재지 않고 그냥 한 말인가?
"나도 모르게 그냥 입에서 툭 튀어나온 거다. 근데 그렇게 말씀드리고 집에 오면서 가만 생각을 해보니,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이제까지 난 한 번도 촛불집회 같은 데 나가본 적이 없다. 촛불은 저녁때만 밝힐 수 있는데 애 엄마가 저녁에 어떻게 나가나, 애 봐야지. 그런데 낮에 애들 유치원 가고 학교 가는 시간이면 나올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 그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주말에 피켓 만들어서 월요일부터 광화문에 나갔다."
-손팻말도 만들어 본 적이 없을 텐데.
"전에 우리 큰애 돌잔치를 할 때 우드락 종이에 뭘 만들었던 기억이 났다. 집에 있는 프린터로 A4 종이 한 장에 한 자씩 프린트를 해서 전지에 대고 오려서 만들었다. 비 올 때를 대비해 투명시트지 사다가 앞뒤로 코팅도 하고."
하루 네 시간의 자유, 엄마들이 뭉치다
-그렇게 작업하는 동안 남편은 뭐라 그랬나?
"…….(웃음)"
-뭐 하는 거냐고 물어봤을 거 아닌가?
"남편은… 내가 금요일에 문상 갔다 왔다고 하면서 '여보, 나 1인시위 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랬더니 되게 반대했다."
-뭐라고 하면서 반대했나?
"(난처한 듯 웃음) '당신이 투사냐?'고…. 집에서 울고불고 조문 갔다 오고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피켓 들고 광장까지 나가겠다고 하니…. '꼭 그런 방법 아니어도, 당신 아니어도 누군가 할 건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런 만류를 뿌리치고 굳이 나간 이유는 뭔가?
"나는 정말 그 어머니가, 그 옛날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 우리 엄마, 아빠 같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나갔다."
-첫 시위를 시작한 4월28일쯤엔 광화문광장에 유가족 농성장, 서명대도 없을 땐데 빈 광장에 혼자 서 있기가 막막하지 않았나?
"어쨌든 광화문 네거리라고 약속은 했으니까 일단 광화문으로 나갔는데 그날따라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허허벌판에 비는 죽죽 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우산 받치고 제 갈 길 가기 바쁘고…. 자리를 어디다 잡을까 하다가, 너무 저쪽 인도까지 가면 창피할 것 같고, 인도하고 이순신 동상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좀 창피한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의 나는 너무나 무기력했는데,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니까 용기를 내자' 맘먹고 서 있었다. 그렇게 네 시간을 견디고…."
-네 시간을 하겠다는 원칙은 왜 세운 건가? 일인시위라 해도 혼자 그렇게 길게 하긴 어려운데.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집에서 9시 반에 나오면 광장에 11시에 도착한다. 우리 아이가 4시 반에 돌아오니까 그때까지 집에 가려면 광장에서 3시에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11시에서 3시까지.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 최선의 방법이었다."
무덥고 습한 날씨, 한창 불볕이 내리쬐는 시간에 오지숙은 반듯하게 정장을 갖춰 입고 거리에 섰다. "최대한 정중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위를 하다가 자리를 비우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어서 화장실도 가지 않으려 가급적 물도 삼갔다. 남편과 아이들 아침 먹여 보내고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은 거르기 일쑤였고 점심도 못 먹은 채 다시 허겁지겁 돌아가 아이들 저녁을 차려주는 날들이 6주째 이어졌다. 기진맥진 쓰러지면 손가락 까딱하기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오지숙 곁에 손팻말을 드는 엄마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평소 알던 분들인가?
"아니다. 대개가 에스엔에스(SNS)로 이어진 분들이다. 페북은 2012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페북 친구가 좋은 글을 공유해서 보게 되면 그분 찾아가 친구맺기를 하고 또 좋은 글 보면 그렇게 하고… 그게 내가 새롭게 정보를 얻고 사회를 알아가는 방법이었다. 내가 일인시위 나올 때까지 페북 친구가 이백 몇십 명 있었는데 시위 시작한 지 2주쯤 지나서 '사교육걱정없는 세상' 회원분들이 같이 하기 시작했고 5주째 될 때 세 분의 어머니가 날 찾아오셔서 교대해줄 테니 돌아가면서 하자고 제안하시면서 '리멤버 0416' 모임이 만들어졌다."
-생면부지의 엄마들을 뭉치게 한 공통분모는 뭘까?
"같은 아픔, 같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진다. 엄마의 마음이라는 게 자식이 울거나 아프면 왜 우는지 왜 아픈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감정이입을 하지 않나. 내가 만난 엄마들을 보면 '이심전심'이란 게 뭔지 실감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공주에서 올라오신 엄마 한 분이 나를 보자마자 막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마음이, 우리가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리멤버 0416'이나 '엄마의 노란 손수건'처럼 세월호 이후 자발적으로 결성된 엄마 모임의 활동이 두드러지지만, 여전히 많은 엄마들은 사회적 발언을 하거나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주저한다. 낮에 주택가 카페나 근교 맛집에 가면 엄마들로 꽉꽉 차 있는데, 그렇게 열심히 모여서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눌까 정말 궁금해서 남몰래 (웃음) 귀를 기울여 본 적도 있다.
"70~80프로가 자녀 얘기다. 그담이 남편 얘기. 그리고 백화점 문화센터나 주민센터에서 뭘 배운다는 얘기."
-그게 다인가?
"그게 다다.(웃음) 근데 나도 사실 아줌마 생활 해보니 이해가 된다. 엄마들은 애들 학교 보낸 시간이 퇴근시간이다. 학교에서 애들 돌아오는 때가 출근시간이고. 카페나 맛집 몰려드는 아줌마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남자분들 많은데,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저기요, 그래도 우리는 저녁에 호프집 가서 술 마시고 있진 않거든요.'(웃음) 애들 학교 보내고 퇴근시간에 동료들(다른 엄마들) 만나서 수다라도 떨어야지, 그렇게라도 안 하면 매일 반복되는 일과에 아마 돌아버릴 거다."
-하지만 그러고 돌아서면 허전한 일상이다.
"나도 사실 늘 갈증이 있었다. 지난 대선 하루 전날이 우리 아이 기말고사 본 다음날이었는데, 엄마들이 모여서 계속 기말고사 얘기만 하는 거다. 우리 애는 몇 점 맞았고 뭐가 틀렸고…. 참 갑갑했다. 한번은, 평소에 굉장히 활달하던 분이 침울하게 앉아계셨다. '언니, 왜 그래?' 하니까, '이번에 아이가 시험을 죽을 쒔다'면서 '애 성적이 떨어지니까 너무 우울하고 살기도 싫어' 이런 얘기를 막 하더라. 그래서 '언니는 언제가 행복했어?' 그랬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글쎄… 별로 행복했던 기억이 없네' 하면서 우시더라."
악에 받쳐 '전교 1등'을 하며 깨달은 것
-어떤 식으로든 주부 스스로 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한 사회활동이 필요한데, 종교적 네트워크를 통하지 않고는 엄마들이 대외활동에 선뜻 나서기를 꺼린다. 어떤 심리적 장벽이 있는 것 같다.
"난 그 장벽이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웃에서 만난 엄마들은 그냥 보통 엄마들이다. 그 엄마들 보면 내 자녀가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까봐 굉장히 두려워한다.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쫙 줄 세우는 세상인데, 엄마가 좀 더 신경 쓰면 아이 성적이 잘 나올 수도 있는데, 그걸 안하고 엄마가 뭐 다른 걸 한다는 게 두렵기 때문에 나가지지가 않는 거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만있으라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가르친 걸 후회한다고. 정말 변화가 올까?
"내 삶을 돌아보건대 교육에 대해 난 강한 확신이 있다. 아이가 좋은 대학을 간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고. 우리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나처럼 비참하게 안 살려면 공부 잘해야 된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공부 잘해서 출세하는 길밖에 없다'고.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는데 중학교 등록금이 없어서 어머니가 '중학교 진학을 한 해 늦추면 안 되겠니?' 얘기할 정도로 가난했다. 거기서 내가 살아남는 길은 죽어라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갈 때도 국가고시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변변히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다. 친구를 사귀는 건 내 시간을 그만큼 내주는 일인데, 난 공부를 해야 하니까. 아무것에도 눈 돌리면 안 돼.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충분히 행복을 느껴야 하는 시간에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그 덕에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내가 여기 광장에 서 있으면서 조선일보 전광판에 나온 기사를 봤다. 우리나라 대기업 평균 근속연수가 9.5년이라고. 우리나라 엄마들은 아이가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가라고, 어릴 때부터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그 많은 학원을 보내면서 자녀를 키운다. 그동안 아이들이 희생해야 하는 무수한 행복들이 있다. 대학교 졸업장 하나? 그게 아이한테 절대로 행복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는 걸, 난 내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다."
지난 5월 오지숙의 중1짜리 아들은 학교를 하루 빠지고 엄마를 따라 나와 현장체험학습을 했다. 세월호 문제나 의료 민영화로 일인시위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시청 앞 분향소에서 분향을 한 뒤 쓴 보고서의 제목은 '민주시민의 자세와 이웃의 역할'이었다.
-일인시위 하면서 얻은 게 있다면?
"집에서 울고만 있을 때보다는 아주 작은 힘이나마 유족들한테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위로가 된다. 누구는 나더러 '당신, 정치할 거냐?'고 하는데,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건가? 주권자로서 내가 내 소리 내는 게 다 정치지. 정치인들만의 정치에서 모든 국민, 유권자의 정치로 정치가 좀 내려왔음 좋겠다. 누가 물으면 '아, 저는 지금 정치활동 중입니다. 엄마는 정치활동 중!'이라고 답할 거다."
아직 정치는 국민의 것이 아니었을까. 유가족의 바람과 상관없이 세월호 특별법의 여야 합의소식이 전해진 8월7일, 오지숙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쑈쑈쑈... 새민련 너희 뭐냐? 구해주러 온 해경인 줄 알았더니 팬티만 입고 도망가던 선장 일행이구나! 일인시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가다말고 지하철역 바닥에 앉아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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