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어쩌다 모였냐고? "함께 잘살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남동 가자"고 하면 상당수 반응은 이랬다. "연, 뭐? 거기 서울이니?" 그나마 그곳을 '안다'는 일부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왜? 기사 식당 찾아? 아님 중국집?"
그랬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 지금은 '앞다퉈' 찾는 핫(hot)한 동네가 됐다. SNS에 '연남동 인증샷' 정도는 하나 남겨야 트렌드 좀 안다는 취급을 받는다. 홍대 근처 지역의 동네들이 그러하듯 홍대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닿는 연남동 역시 홍대의 자유분방한 예술적 감수성을 이식한 동네라고들 한다. 재래시장인 동진시장 부근에 최근 몇 년 사이 툭툭누들타이(태국), 히메지(일본), 베무초 칸티나(멕시코) 등 이국적인 식당이 인기를 끌면서 '넥스트 가로수길' '넥스트 경리단'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연남동(최근 들어 동교동 일부도 범연남동으로 부른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젊음'을 취하되 '나이 듦'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연희동 남쪽'이라는 뜻의 연남동은 지금은 낡아 보이지만 1973년 서대문구 성산동과 연희동의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면서 형성된, 한때 마포구에서 '가장 젊은 동네였던' 이력 때문인지 '난 아직 젊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하다. '재생' '공존'이라는 단어를 공간으로 표현한다면 가장 적합한 곳이 연남동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문을 연 많은 가게 주인들이 '자석같이 끌려왔다'고들 입을 모은다.
홍대의 북적임을 피해 한적한 여유와 낭만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선 홍대 '옆 동네'인 상수동과도 비슷하지만 좀 더 낡고 예스럽다. 30년 된 세탁소에서부터 '빠마'를 상호로 내건 미장원, 손때 묻은 간판들과 머리 희끗한 손님들의 얼굴에선, 마치 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다. 그 바로 옆에 홍대나 경리단에서 봤을 법한 식당이나 카페가 얼굴을 빼꼼히 들고 있다. 모던한데도 동네 분위기에 잘 녹아든다. 흔한 말로 '난닝구(러닝셔츠)와 쓰레빠(슬리퍼) 패션' 옆에 '스냅백(아이돌이 많이 착용하는 일종의 야구 모자)에 백팩, 스니커즈(운동화의 일종) 패션'이 어깨동무하는 형상이다.
올 초 동진시장 안쪽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씨시'를 연 박흥규(51) 셰프의 사연은 이렇다. 지난해 이곳을 찾았다가 사흘 밤낮을 여기 사람들과 술 마셨고 그 자리에서 가게도 계약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랄까? 팍팍한 서울 도심 생활에 지치다 이곳에 오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7일 만난 자칭 '연남동 마니아' 김상섭(38)씨는 "어울림과 편안함이 연남동을 대표하는 키워드"라고 평했다. "청담동이나 경리단에 가려면 옷매무새라도 한 번 더 고쳐봐야 할 것 같아 부담되고, 홍대는 20대의 전유물인 거 같아 꺼려지는데, 이곳은 20대부터 70~80대까지 어울려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여의도에 이어 최근 연남동에 2호점을 낸 '브레드 랩'의 유기현 셰프는 "보존과 조화의 미덕을 아는 동네"라고 말했다.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새 단장을 하기보다는 기존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고,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게 꾸민다. 일부 상업지구는 번쩍번쩍한 간판을 서로 뽐내며 '가게가게가게가게'가 이어져 숨이 턱 막히는데 이곳은 주택가 사이사이로 가게들이 '숨은그림찾기' 하듯 들어서 한결 여유롭다는 설명이다.
'아직은'이라고들 하지만 매장 주인들 사이에선 연남동도 기존의 홍대나 가로수길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한 가게 주인은 "불과 5개월 전에만 해도 매매가 4억원대 초반 상가형 주택이 현재 10억원을 호가한다"며 "중국인들과 강남 땅 부자들이 하루에도 10번씩 가게 매입을 알아보러 온다"고 말했다.
연남동이 또 한번 새로운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예술가 사이에서 한창 이슈가 됐던 '문화 백화현상'(임대료 상승으로 예술인들이 떠나가고 기존의 개성 있는 문화가 점차 사라짐)에 대응하기 위해 '5년 월세 동결'을 내건 복합 편집매장인 '어쩌다 가게'가 연남동을 '1호점'으로 택했다.
뜨고 지는 동네의 패턴은 무섭도록 비슷하다. ①느낌 좋고 개성 있는 가게들이 하나둘씩 작은 동네 골목에 자리를 잡는다. ②트렌드에 밝은 이들이 모여들고 젊은이들이 속속 찾으면서 소문이 난다. 특히 요즘은 SNS 등이 발달해 맛집·멋집으로 등재되는 건 시간문제. ③동네 명성만 뜨는 게 아니라 임대료도 덩달아 뛴다. ④치솟는 세를 감당할 수 없어(건물주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포함) 그 동네를 떠난다. ⑤그 자리를 메우는 건 대기업 매장이나 프랜차이즈.
강남 가로수길은 세로수길·뒤로수길이란 신조어를 낳았고, 홍대에서 재기 발랄함을 뽐냈던 이들은 합정역 부근, 상수동 등지로 다시 헤쳐 모였다. 부동산 상권에선 '확장'이라 표현하지만 동네 고유의 맛을 원하던 사람들은 '빛을 잃었다'고 말한다. 일명 '도시판 정글의 법칙'. 동네가 발전하고 집값이 올라야 기존 지역 주민에겐 좋겠지만, 막상 그곳을 찾아 장사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성공해도 성공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든다고들 한다. 어딜 가도 서바이벌이란 말이다.
연남동 '어쩌다 가게'(실제 지명은 동교동)는 그러한 소상공인들의 고민을 덜어줄 하나의 실험적 모델이다. 홍대 3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내려와 우회전하면 만나게 되는 곳인데, 마당이 딸린 2층 가정집을 개조해 복합 매장으로 구성했다. 매장은 겉에서 보면 1층에 통유리창이 있는 가정집인가 하고 지나칠 정도였다. 하지만 내용물은 완전히 다르다. 정원과 라운지 등을 서로 공유하며 최근 핫 이슈로 떠오른 공유 경제를 '공간'으로 실현하면서 '5년간 월세 동결'이란 조건으로 '생존권'을 우선 보장했다. 즉 '나만 잘살자'가 아니라 '함께 오래 잘살자'를 표방한 것이다. 건축가이자 홍대 앞에서 '비하인드' 카페를 운영하는 임태병 소장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역량 있는 이들이 외풍에 견디며 개성을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해 5년 전세로 건물을 임대해 쪼개고 나눴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안군서씨는 "서로 커뮤니티도 형성하고 그들이 보유한 콘텐츠를 지속 가능하게 대중에게 선보이는 플랫폼을 구상한 것"이라며 "반응이 좋아 제2, 제3의 어쩌다 가게를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쩌다 가게의 방에는 8개의 숍과 작업실이 입주해 있다. 1층엔 조각 케이크공방 '피스피스'와 서점 '별책부록', 수제화숍 '아베크', 싱글몰트 위스키바 '엔젤스 쉐어', 2층엔 100% 예약제 1인 미용실로 유명한 '바이 더 컷'과 실크 스크린 작업실 '에토프', 초콜릿 공방 '비터스윗나인', 꽃집과 핸드메이드 소품을 겸하는 '아 스튜디오'로 구성됐다. 이들은 1층 라운지와 정원을 공유하며 손님들에게도 개방한다. 손님들은 라운지나 정원에서 책도 보고 케이크나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 일종의 '쉐어 스토어(share store)'다.
지난 8일 1층 라운지를 찾아보니 입점 브랜드뿐만 아니라 여의도의 유명 빵집 브레드 피트의 커피, 홍대 맛집 비하인드의 파니니와 도넛, 사루비아 다방의 차 등 서울 곳곳 유명 베이커리·카페의 대표 제품을 사먹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 매장들을 일일이 돌아보지 않고도 라운지 한 곳에서 모든 걸 맛볼 수 있었다. 라운지 직원에게 물으니 공간만 나누는 게 아니라 서로 좋은 제품도 나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비하인드 도넛에 비터스윗나인의 초콜릿을 덧입혀 한층 입맛 끄는 제품을 내놓는 것이다.
'어쩌다 가게'로 시작된 나눔 정신은 조금씩 꽃을 피우고 있다. 최근 연남동에도 둥지를 튼 여의도의 유명 빵집 '브레드 랩'이 그렇다. 어쩌다 가게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공간과 제품 공유에서 비슷하다. 브레드 랩의 유기현 셰프는 동진 시장을 가장 핫한 지역으로 끌어올린 툭툭 누들타이의 임동혁 대표와 커피 리브레의 서필훈 대표와의 끈끈한 우정 덕에 연남동으로 눈길을 돌렸고, 마침 툭툭 누들타이가 2호점인 '소이연남'을 오픈하면서 그 건물 2층에 입주했다. 역시 마당이 있는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다. 브레드 랩의 커피는 연남동의 대표 카페인 '커피 리브레' 제품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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