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 전 청계천 ‘시다의 눈물’이 지금은 ‘인턴의 눈물’로
ㆍ‘전태일 44주기’… 여전히 열악한 의류노동자 실태
ㆍ10~15시간 일해 일당 1만~2만원, 세 끼 밥값도 못 받아
ㆍ근로계약서 안 쓰고 정직원 전환 말뿐 “밉보이면 해고”
국내 패션업계에서 7년째 일하는 안모씨(28)는 최근 ‘패션노조’ 고충상담소에 글을 남겼다. “돈 받고 싶어요.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어요. 밤 11시에 퇴근해 ‘초승달 예쁘다’고 혼잣말하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 따뜻한 엄마 밥 먹고 싶어요. 그런데 우린 언제쯤 그럴 수 있을까요?”
패션업계 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해 출범한 패션노조에는 최근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비인격적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의 상담이 이어진다. 전태일 열사가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며 분신한 건 1970년 11월13일. 열사가 몸을 불사른 것은 44년 전이지만 의류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경향신문이 패션노조로부터 중소 패션업체·개인 디자이너숍에서 일한 인턴 9명의 상담 사례를 종합한 결과 이들은 인턴 시절 하루 10~15시간 노동했다. 주 6일 근무에 패션쇼를 앞둔 기간은 주말을 반납한 사례도 다수였다. 수년 전 부산의 한 패션업체에서 일한 이모씨(28)는 “이 업체에선 국경일에도 나오라고 했다. 직원이 4명뿐인 회사에 단체카톡방을 만들어 쉬는 날이나 퇴근한 뒤에도 마음 놓고 쉬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인턴 월급은 30만~60만원으로 일당 1만~2만원꼴이다. 한 끼 식대를 7000원이라고 치면 세 끼를 사먹기도 힘든 돈이다. 1970년대 평화시장 재봉틀 여공(미싱사 보조·시다) 노동자들 처지와 비슷하다. 당시 시다들은 하루 14~16시간 노동에 휴일은 한 달에 이틀 정도였다. 월급은 1800~3000원으로 일당 약 60~100원꼴. 당시 신문 1부 가격이 20원, 담뱃값 10원, 시내버스비가 10원이었다. 야근수당이나 시간외수당을 받지도 못했다. 2012년부터 2년간 서울의 중소 패션업체에서 근무한 이모씨(24)는 “회사는 전체 월급에서 일부를 야근수당으로 쪼갰다. 1시간을 야근하든 100시간을 야근하든 매달 같은 급여를 받았다”고 말했다. 신모씨(25)는 “처음 들어갔을 때 월급이 50만원이라는 말에 놀랐는데, 그래도 배운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의류노동자의 복지여건도 열악하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운동을 시작할 당시 평화시장은 환기가 안되는 폐쇄된 환경으로 노동자들의 호흡기 질환이 만연했다. 건강검진은 형식적이었고 병에 걸리면 강제해고를 당하는 일도 잦았다. 요즘 인턴 대다수는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린다. 성과 나이를 밝히지 않은 한 의류노동자는 “태어나서 병원을 그렇게 많이 다녀본 적은 처음”이라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4대 보험을 들어준 회사도 거의 없어 산재가 나도 고스란히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업체들도 드물다. 디자인숍들은 인턴을 고용한 뒤 애초 약속대로 정직원으로 돌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인턴 기간을 무한정 늘리거나 다른 인턴을 고용해 대체한다. 안모씨(28)는 “지금 네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그동안 다닌 세 군데의 회사에선 단 한번도 근로계약서를 쓴 적이 없다. 21살에 처음 취업하는 아이에게 근로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말해주는 선배도 없었다”고 말했다.
부산 패션업체에서 일했던 이씨는 “예전에 있던 회사에서 컵라면 심부름부터 아침마다 물 떠드리기, 점심 메뉴 체크 등 온갖 잡일을 다 했는데, 한참 일하고 나서야 인턴도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걸 알았다”고 했다. “또 전에 취업한 한 업체는 인턴 기간이 무한이었다”고 말했다.
패션업계에서는 디자이너를 지망하며 들어온 인턴들에게 피팅모델 역할과 잡무를 함께 시킨다. ‘옷발이 안 선다’는 이유로 채용을 안 하거나 해고하는 일도 많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해 취업시장에 뛰어든 이모씨(25)는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들고 면접을 보러 가면 회사관계자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들이 갖다주는 옷을 입어보게 한 뒤 대충 보냈다”며 “다른 곳도 면접에서 돌아오는 것은 거의 몸매 평가뿐이었다. 옷을 입어보려 4년을 공부한 건지 회의가 들었다”고 말했다.
성·나이를 밝히지 않은 또 다른 인턴은 “겨우 피팅으로 면접에 붙어 들어간 회사는 2주 동안 일을 시키다가 어깨가 옷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나오지 말라고 통보했다”며 “비용이 아까워 막내 디자이너에게 피팅을 강요한다. 한때 체형교정 수술까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있어도 ‘디자이너는 원래 그래’ ‘패션계는 원래 그래’라는 말들만 오갈 뿐”이라고 했다. 패션노조 측은 “인턴들은 ‘한번 찍히면 매장된다’는 업계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류노동자 권익 운동은 걸음마 단계다. 전태일 열사가 44년 전 ‘바보회’를 만들 때처럼 참여 인원은 적다. 패션노조 측은 최근 페이스북에 “의류노동자 여러분들은 잘못한 게 없으니 눈치 보고 숨죽일 필요는 없다. 집 안에 있는 숟가락이라도 들고나와 싸우는 심정으로 지금 이 변화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및 사망 소식을 알리는 경향신문 1970년 11월14일자 기사(위 사진). 그 한 달여 전인 10월7일 경향신문은 평화시장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처음으로 고발 보도했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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