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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보의 문루인 '안해루'. |
ⓒ 문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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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로 배치 받았는데, 겨울에 얼마나 추울까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던 경은씨가 군대 간 아들 걱정을 했다. 올 겨울이 추울까봐 벌써 걱정이라며 눈이 많이 안 오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자 뒤를 따라 걷던 영이씨가 요즘 군대는 옛날과 다르니 걱정 말라며 안심시켰다. 그 말에 다소 위로는 되었겠지만 그래도 경은씨는 아들이 제대하는 그날까지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눈이 많이 오면 눈 치우느라 고생할 아들이 생각났고, 더우면 이 더위에 훈련할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지나가는 군인만 봐도 마치 내 아들인 양 여겨져서 다시 한 번 쳐다보기도 했다. 군대에 아들을 보낸 엄마들이라면 모두 이런 마음으로 지냈을 텐데, 경은씨도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아들이 군대에 있을 때는 제대만 하면 끝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현역군에서는 제대했지만 대신 예비군이 되어 일련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현역에서 제대한 남자들은 직장이나 지역예비군에 소속되어 그 임무를 다해야 한다.
150년 전 그때도 현역군과 예비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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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전사한 조선군들. |
ⓒ 강화역사문와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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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군사 체계는 과거에도 있었던 듯하다. 정규군 이외에도 향토방위군이 있었을 것 같다. 고려의 강화 천도 시기에 바다를 메워 논을 만들어 둔전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때에도 보통 때는 농사를 짓다가 비상시에는 전투병으로 투입되는 병사들이 있었나 보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터. 강화도 전 해안에 있는 돈대와 그 상급기관인 '진'과 '보'에는 상주하는 병사가 있었다. 약 1500명의 병사가 54개에 달하는 돈대, 진, 보를 나누어 경계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강화를 지키는 병사들은 더 있었을 것이다. 그 병사들은 모두 정규군이었을까? 혹시 지금의 예비군이나 민방위대원들처럼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 등의 생업을 하다가 적이 침입해오면 소집되어 전투에 투입되는 병사들도 있지 않았을까?
강화해협을 따라 난 나들길을 걷다가 신미양요의 현장인 광성보에 닿았다. 광성보에는 그때의 참상이 담긴 사진을 입간판으로 세워놓은 곳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조선군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있다. 포연과 먼지가 자욱하게 낀 돈대에는 적과 싸우던 조선군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그 곁에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미군이 거만스런 자세로 서 있다.
사진 속의 조선군들은 모두 흰옷 차림이다. 바지저고리 바람으로 쓰러져 있는 병사들의 곁에는 병장기들도 보이지 않는다. 맨몸으로 싸우다 쓰러진 것일까. 맨 상투 바람인 병사들 곁에는 벙거지가 나뒹굴고 있다. 흰옷과 맨상투 차림인 조선군에게서는 훈련을 받은 병사의 모습보다는 보통의 백성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투에 투입된 평민도 있지 않았을까?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민과 군이 따로 있겠는가.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나와 가족, 내 터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니, 어찌 몸을 사리겠는가. 그래서 당시 백성들까지 나서서 적과 대치하며 싸웠을 것이다. 흰옷을 입고 쓰러진 조선군들을 보자니 앞서 간 역사로만 알았던 신미양요가 가깝게 느껴졌다.
바지저고리 바람으로 쓰러진 흰옷의 조선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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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보의 손돌돈대에서 내려다 본 강화해협 |
ⓒ 이승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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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옛적부터 숱한 전란을 겪었다. 이민족의 침입에 전 국토가 유린되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나라 전체가 전장이 되었고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웠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에도 그랬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조선을 개항시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꾀하려는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넘봤다. 수도인 한양과 가까운 강화도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적들은 수도인 한양의 코앞까지 진격해서 위협했다. 그들은 물류의 흐름을 막아 도성을 마비시킬 심산으로 강화도를 점령하려고 했다. 삼남과 기호지방에서 난 물자들은 강화도를 거쳐 한강으로 간다. 그 길을 막으면 도성의 물가는 올라가고, 조선의 조정은 곤란에 처할 것이다.
그래서 병인년에 프랑스가, 또 신미년에는 미국이 강화도를 유린하였고 그로부터 5년 뒤에 있은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을 한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거센 역사의 격랑 속에 내몰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나라를 잃는 아픔까지 겪는다.
1866년 8월 20일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서 조선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 사건은 몇 달 뒤에나 미국에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는 배에 타고 있던 23명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아시아로 진출해나가자 다급하던 차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공사로부터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전해 듣자 조선에 보복하고 개항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너럴셔먼호가 격침된 이듬해인 1867년부터 1869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군함을 보내 조사를 한 미국은, 미국 선원들이 먼저 조선인을 죽이고 납치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 정부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자국민을 죽인 조선 정부의 책임을 따지면서 그 대가로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했다. 그때마다 조선 정부가 거절하자 병인년에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강화도를 점령해 조선 정부를 협박하기로 한다.
조선원정대, 남북전쟁 경험까지 있는 1200명 정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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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때 미군의 포격으로 흙먼지와 포연이 자욱한 돈대와 전사한 조선군들. |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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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아시아 함대의 사령관인 로저스 제독에게 조선 원정을 명령했다. 로저스 제독은 페리 제독이 1854년에 일본을 포함외교(砲艦外交)로 개항시킨 것처럼 조선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개항시키려고 마음먹었다. 포함외교란 함대를 파견해서 압력을 가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는 외교 전략을 말하는데 주로 강대국이 군사 약소국이나 식민지에 동원했던 군사 외교 방법이었다.
1871년(고종 8년) 5월 초에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로저스 제독은 전 함대를 일본 나가사키에 집결시킨 뒤 해상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군함 5척과 해군 1200여 명으로 이루어진 '조선원정대'를 만들어서 5월 16일에 나가사키항을 출항해 조선으로 향하였다.
조선원정대의 규모는 엄청났다. 군함 5척(기함 1, 순양함 2, 포함 2)에 대포도 85문이나 설치되어 있었다. 또 1230명이나 되는 병사들은 남북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병사들도 다수 섞여 있는 정예병들이었다.
당시 강화도 해안에는 대포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경계를 하는 군사들 역시 많이 배치됐다. 하지만 미군과 질적으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남북전쟁을 치른 경험도 있는 해병대와 수병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군에 비해 조선군은 전투경험이 일천하였다. 비록 몇 년 전에 프랑스군을 격퇴시킨 경험은 있었지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는 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871년 6월 1일 정오 무렵에 초지진 앞바다에 이양선이 나타났다. 미군은 대포가 실려 있는 군함 두 척과 작은 배 네 척으로 탐사대를 이루어 본대가 있는 작약도를 출발해 초지진 앞바다에 나타났다. 군함은 초지진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광성보까지 올라갔다.
병인양요를 겪은 뒤 서양 함대의 위력을 절감한 조선 조정은 이양선이 자주 나타나는 서해안에 병사들을 집중 배치했다. 대포를 다룰 줄 아는 병사 3000여 명을 뽑아 서해안의 곳곳에 배치해두었다. 강화도에는 특별히 진무영을 조직해서 훈련도감의 군사 200명을 비롯해서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에서 100명씩 뽑아 모두 500명의 군사를 배치했다. 어재연 장군은 진무영을 지휘하는 중군에 발탁되어 광성보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북전쟁 때도 겪지 못한 15분간의 집중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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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보 안에 있는 용두돈대의 총을 쏘기 위해 낸 구멍으로 바라본 바다. |
ⓒ 이승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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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주변의 바다는 물살이 빠르고 거세기로 유명해서 따로 '손돌목'이라 부른다. 더구나 암초도 많아서 물길을 모르는 사람이 손돌목을 지나가다가는 암초에 부딪히거나 거센 물살에 휩쓸릴 수도 있다. 어재연 장군은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다가 적함이 광성보 부근에 닿았을 때 명령을 내렸다.
"대포를 쏘아라!"
그러자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대포를 쏘았다. 순간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무너져내리도록 굉음들이 울려퍼졌다. 조선군은 때를 놓치지 않을 심산으로 적함을 향해 연거푸 대포를 쏘았다.
조선군이 쏜 대포는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마치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미군 군함이 대포의 방향을 광성보 쪽으로 돌려 포탄을 날렸다. 조선군과 미군은 약 15분 동안 포탄을 서로 날렸다. 광성보 앞바다는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포연에 휩싸였다.
탐사대장으로 나섰던 미국 해군 중령 블레이크가 "이처럼 좁은 바다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토록 집중 포격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남북전쟁에서도 이런 포격은 당해보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 조선군은 적을 향해 많은 양의 포탄을 쏘았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포탄을 날렸지만 조선군은 미군 측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대포의 명중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포들은 강화해협 쪽으로 방향이 맞춰져 있었지만 포신을 좌우로 돌리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목표물을 조준할 수가 없었다.
대포들은 통나무로 된 포좌에 고정되어 있어 신속하게 사격방향을 조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대포의 사정거리도 짧을 뿐만 아니라 포탄 또한 파괴력이 없는 그저 커다란 쇠구슬 정도에 불과해서, 설혹 명중을 시켰다 해도 배에 구멍이 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무기의 단점을 보완했기 때문에 대포의 성능이 매우 뛰어났다. 명중률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포탄이 날아가는 거리 또한 길었다. 또 목표물에 맞으면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래서 어재연 장군은 부득이하게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미 군함 한 척이 암초에 부딪혀 물이 새어드는 바람에 미군은 강화해협을 따라서 서울까지 올라가겠다는 계획을 접고 본대가 있는 작약도로 돌아갔다.
조선군과 미군 사이의 최초 전투였던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분전했지만 그것은 미군에게 위협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군의 화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노출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열흘 뒤에 또 다시 강화도 상륙작전을 결행한다. 1871년 6월 10일, 미국 함대는 해병대와 해군 650명을 태우고 다시 초지진 앞에 나타났으니 이른바 '신미양요'가 바로 그것이다.
광성보의 단풍, 그때의 충정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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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는 광성돈대에서 본 대포들. |
ⓒ 이승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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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5일에 가까이 지내는 이들과 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다 광성보에 닿았다.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는 사람들이 단풍이 곱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봄날의 종달새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유치원 아이들도 보였고 턱 밑에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돋기 시작하는 중학생 남자아이들도 무리를 지어 몰려다녔다. 소곤대며 걸어가는 청춘의 연인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부부까지 가을 햇살과 어울려 모두 빛이 났다.
1871년 6월의 그때도 광성보는 이렇게 아름다웠나 보다. 조선원정대에 참가했던 미군의 한 해병 대위가 본국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나라는 정말 아름다워요. 온통 아름다운 산과 계곡으로 가득 차 있고, 들에는 온갖 곡식이 자라고 있어요. (중략) 모든 것이 푸르고 아름다우며, 작은 초가집들은 소나무 등 여러 상록수 숲 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던 강화도의 동쪽 해안은 열흘 뒤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천지를 뒤흔들듯이 울리는 포성과 자욱한 연기 속에 초지진과 덕진진 그리고 광성보는 부서지고 무너졌다.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병사들은 포탄과 총알에 맞아 죽어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적을 향해 흙을 뿌리고 돌을 던지면서까지 싸웠던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 광성보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 마치 그 분들의 충정인 양 가슴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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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때 몸을 던져 적의 침입에 맞써 싸우다 전사한 이름없는 병사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