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쪽. 25일 한국과 중국 정부가 가서명한 자유무역협정(FTA)의 분량이다. 기본 협정문만 307조, 195쪽에 상품 양허표 468쪽, 서비스 양허표 116쪽, 품목별 세부 원산지 기준(PSR) 관련이 298쪽에 달한다. 올 상반기 중에 정식 서명을 거쳐 국회 비준 동의를 거치면 이르면 올해 안에 발효될 전망이다. 14억 중국 소비시장의 빗장이 열리는 셈이다.
이날 가서명하면서 공개된 한·중 FTA 협정문과 양허표는 기존에 체결키로 약속한 협정의 ‘속살’을 자세히 드러냈다. 관세를 매기는 품목별(HS코드)로 ‘즉시 철폐’와 ‘5년 내 철폐’등 자세한 ‘개방 시간표’을 공개했다. 한국은 수입액 기준 77%(623억 달러)에 해당하는 관세 장벽을 최장 10년 내 철폐하게 된다. 20년 뒤엔 수입액의 91%(736억 달러)로 늘어난다. 중국은 수입액의 85%(1417억 달러)에 해당하는 품목의 관세를 최장 20년 내에 없애기로 했다. 정부는 한·중 FTA를 통해 연간 54억4000만 달러(약 5조9000억원)의 관세가 절감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본래 FTA 협상은 치열한 ‘창과 방패’의 수싸움이다. 한국은 ‘중국산 농산물 공습’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마늘·양파·고추와 같은 민감한 품목의 개방을 막아냈다. 이 때문에 한·중 FTA를 놓고 그동안 여러 협정 가운데 ‘농업 개방의 수준이 가장 낮다’는 얘기가 나온다. 다만 참깨·팥·대두 등은 일부 물량에 대해서 관세를 물지 않는 저율할당관세(TRQ)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참깨는 중국산을 수입할 때 당초 관세가 630%(WTO TRQ에 따라 일부 물량은 40%)였으나 연간 230톤까지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게 된다. 중국에 수출할 때는 관세가 10%였으나 10년 내 철폐된다. 중국산 팥은 관세가 420.8%(일부 물량 30%)에서 3000톤까지 무관세로 수입하고, 국내산 팥은 중국에서 3% 관세를 물렸지만 즉시 철폐된다.
사실 중국이 겁낸 건 ‘공산품 시장’이었다. 질 좋은 한국산 석유화학·기계류 제품이 들어오는 걸 막으려 했다. 석유화학은 한국 기업들의 대중 수출액이 수입액 보다 13배 이상 큰 흑자 산업이다. 중국이 이온교환수지 같은 첨단 품목을 개방하긴 했지만 한국은 합성고무·합성수지를 열어주면서 밀린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박천일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한국은 중국의 빗장을 여는 공격 포인트로 ‘최종 소비재’ 품목을 겨냥했다”며 “예컨대 중소형 생활가전이나 의료기기·가전부품 등에서 중국 수출이 유리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관세 즉시 철폐’ 품목 중에 들어간 휴대용 컴퓨터나 컴퓨터 부품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동안 대중국 수출은 소비재보다는 중간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기업들이 재미를 많이 봤지만 중소기업은 취약했다.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였던 자동차 분야는 두 나라 모두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대부분을 관세 철폐 대상에서 배제했다. 자동차의 경우 중국으로 수출할 때 현행 25%(아세안자유무역협정으로 일부 품목은 22.5%), 수입할 때 8% 관세율이 그대로 유지된다. 사실 한국 기업의 수출 차량은 국내 공장에서 생산한 것들이 별로 없어 개방 이익이 크지 않다. 중국에서 연구활동 중인 이문형 산업연구원 박사는 “자동차 부품 등의 경우도 당장 어떤 효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중국에선 긴장하는 분위기가 있긴 하다”며 “대중국 수출 1위의 제조업 대국인 우리와 처음 자유무역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그동안 주로 중국 인력을 활용해 임가공업을 많이 펼쳤다면 이젠 한걸음 도약해 ‘내수 시장’을 본격 공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수출하는 스포츠웨어·유아복과 같은 주요 패션의류 상품은 중국에서 관세를 물지 않는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연사·직물과 같은 원재료 비용도 줄어든다. 현지 시장에서 한국산 의류의 가격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국내 철강 산업은 피해가 예상된다. 열연·후판·냉연 등 대부분 10년, 15년으로 관세 철폐 기간이 길다. 중국 철강 시장은 세계 수요의 45%를 차지하는 노른자위다. 유승록 포스코경영연구소 상무는 “보통 철강제품 관세율이 5% 가량인데 10년간 이를 없애면 매년 0.5% 포인트씩 가격 인하 효과를 보는 셈이다”라며 “좀 더 빨리 관세를 없애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국 수출 1위 품목인 LCD 패널은 FTA 발효 후 10년차에 양국 모두 현행 관세(중국 5%, 한국 8%)가 철폐된다. 국내 보일러와 보일러 부품의 관세(8%)가 즉시 철폐되는 반면 중국 측 관세(10%)는 10년 내 철폐돼 수입 급증의 우려도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한국 보일러 보급이 120만 대인데 99% 이상이 국산”이라며 “중국엔 보일러가 150만 대 보급돼있는데 그 시장이 매년 20% 증가해 수출 가능성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법률·건설·유통·환경·엔터테인먼트 분야 시장도 열렸다. 한국 로펌은 중국 로펌과 공동으로 상하이자유무역지구(FTZ) 내 사무소를 설치하고 중국 전역의 고객을 대상으로 법률 자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상하이 FTZ 내에 설립한 한국건설 기업은 상하이 지역에서 외국자본비율 제한(외국 투자 50% 이상) 없이 현지 사업을 수주할 수 있다. 폐수, 고형물 처리, 배기가스 정화, 소음 저감, 위생 서비스 등 5개 환경 분야에선 중국 내에 한국 지분 100% 기업도 설립할 수 있게 된다. 또 국내 여행사가 중국 현지에서 한국이나 제3국의 떠날 관광객을 모집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우태희 산업부 통상교섭실장은 “서비스 분야의 후속협상은 협정 발효 후 2년 내 협상을 개시하고 2년 내 종료하기로 했는데 이때 제외 품목만 정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며 “중국이 체결한 FTA 가운데 서비스 분야의 네거티브 방식 도입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개성공단 생산 제품의 중국 수출도 유리해졌다. 양국 정상의 타결 발표 당시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기로 했는데, 이번에 대상 품목을 310개로 확정됐다. 기존에 체결된 FTA 가운데 가장 많다. 양측이 합의를 통해 변경할 수 있어 사실상 품목 제한이 없다는 것이 산업부의 설명이다.
이날 정부는 한·중 FTA 활용과 경쟁력 강화 방안을 내놨다. 새만금 경제자유구역에는 ‘한·중 FTA 산업단지’가 조성돼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게 된다. 무역협회에는 다음달부터 ‘차이나데스크’가 설치된다. 원산지 관리, 수출시장 개척, 비관세장벽 해소 등을 종합 지원한다. 한·중 문화산업 공동발전을 위한 펀드(2000억원)도 조성된다.
권평오 산업부 무역투자실장은 “한류 등에 힘입어 중국 자본을 한국으로 유치하고 미국·일본·EU과 같은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명실상부한 동북아 비지니스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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