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건물주 천국']자영업자 눈물로 지은 '건물주 천국'
멋대로 임대료, 나 몰라 권리금장사할 만하면 "가게 비워라"서민만 울리는 '지대추구사회'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67평 규모의 홍성 한우집을 운영하고 있는 유모 사장(52)이 내는 월 임대료는 572만원이다. 충남 홍성에서 21년간 직장을 다니다 퇴직 후 상경해 2008년 개업했을 당시 임대료는 400만원이었다. 2년 재계약 때마다 임대료가 뛰면서 개업 당시보다 43% 폭등했지만 영업은 들쑥날쑥하다. 올해는 경기침체에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겹치면서 지금껏 흑자를 낸 적이 없다. 매출의 대부분이 카드로 결제돼 카드수수료만 한 달에 150만~200만원에 달한다. 고정적으로 나가는 임대료와 카드수수료, 직원들의 월급을 주고 나면 한 달 매출이 5000만원까지 올라도 손에 쥐는 돈은 200만원이 채 안됐다. 그래도 서촌 상권이 활성화하고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희망이 보이던 참에 얼마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건물주가 가게를 비워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낸 것이다. 집주인의 자녀가 커피전문점을 내려 하니 이달 말까지 나가달라는 얘기였다.
유 사장은 “입주 당시 권리금 3억원에 시설투자금 5000만원 대부분이 빚이었다”면서 “건물주가 재력도 있고, 장기간 세를 놓는 사람이기 때문에 쫓겨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해 터를 잡았는데 한 푼도 건지지 못하게 생겼다”고 말했다.
서울 잠실에서 4년 전 막국숫집을 시작한 이모 사장(60)도 사정은 비슷하다. 40평 공간에 보증금 3000만원, 임대료는 한 달 220만원이다. 휴일에 가게를 닫더라도 임대료만 하루에 8만원 꼴인데 매출에 비하면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33년간 다닌 직장에서 이사로 퇴직한 뒤 부인과 함께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도 퇴직 전 받던 월급의 30%도 되지 않는다. 이 사장은 “장사가 잘되면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며 나가라고 해서 망하고, 장사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망해서 나가는 게 자영업자 신세”라고 말했다.
치솟는 임대료로 자영업자들의 부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기침체로 인한 소비위축에 세월호나 메르스 등 악재가 겹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 보지만 결국 임대료 부담으로 장사를 접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장사가 잘되면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만 돈을 번다는 우스개는 씁쓸한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임대사업자들에게 대한민국은 ‘천국’이지만 건물을 빌려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개미지옥’이나 다름없다.
부동산114 자료를 보면 서울 이태원 상권의 월 임대료는 2011년 3.3㎡당 9만5370원에서 지난 6월 말 현재 16만830원으로 68.6%, 홍대 상권은 3.3㎡당 7만7220원에서 12만2760원으로 58.9% 폭등했다. 이태원 상권의 2분기 임대료는 석 달 만에 무려 19.3% 상승했다. 경리단길 상권까지 인기를 모으며 평당 40만원이 넘는 고가의 상가가 늘어난 탓이다. 서울 서초구 신사역과 종로구 종각역 일대 역시 월 임대료는 4년 동안 각각 45.7%, 36.4%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임대료가 치솟으면서 폐업하는 가게도 속출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408만2000명)보다 10만7000명 줄어든 397만5000명이다. 1995년 상반기의 397만1000명 이후 20년 만에 최저치다. 전체 취업자(2568만명) 중 자영업자(557만명)가 차지하는 비중은 21.7%로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자영업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보다 치솟는 임대료다.
상권이 뜰 경우 대기업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오면서 영세 자영업자들은 주변 상권으로 밀려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도 심각하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경기침체로 창업 수요가 줄고, 자영업자 간 경쟁도 약화된 상황이지만, 역세권이나 교차로 인근, 대표적 지역 상권 등의 임대료는 계속 오르고 있다”면서 “신규 택지개발지구나 대규모 민간아파트 단지의 상가도 낙찰가가 올라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임대료 상승은 계층 간 양극화도 심화시킨다. 자영업자들이 한 번 망하면 재기하기 힘들고 이는 곧 소비위축으로 이어져 경제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임대료 부담으로 종업원들의 임금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종사자들의 저임금 상황도 심각하다.
반면 건물주들은 임대료 수익으로 다른 부동산을 매입하는 등 지속적으로 지대수익을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점차 지대(rent·공급이 제한됨으로써 발생하는 독점적 이익) 추구형 사회로 변해가면서 서민 부담만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임대소득에 대한 적절한 과세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대표적인 불로소득인 임대료 상승으로 서민들의 노동소득이 고소득층으로 이전되고 있다”면서 “한국 사회가 갈수록 기생 자본주의적 속성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 갱신 거절 땐 고액 보상
철거 때도 건물주가 소명
임대료도 이유 없이 못 올려
상가 임대차계약에서 건물주가 ‘슈퍼 갑’인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임차인 보호가 원칙이다. 가까운 일본의 차지차가(借地借家·땅과 집을 빌림)법을 비롯해 프랑스·영국에서는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임대차계약을 자동 갱신되도록 하거나 장기계약을 유도하고 있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마구 올리는 일도 불가능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일본은 차지차가법상 건물 임대차계약 시 임대인이 ‘정당한 사유’ 외에는 계약해지를 할 수 없도록 한다. 또 계약기간이 만료돼도 계약 갱신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정당한 사유란 건물주(임대인)의 전근, 요양 등으로 부득이하게 건물을 비워야 하거나 건물을 철거할 경우다. 철거도 건축물의 노후화로 불가피한 경우로 한정한다. 이때도 건물주는 서면으로 사유를 소명해야 하고, 사유가 정당한지를 법원이 심사한다. 법원은 건물주가 임차인에게 영업손실에 적절한 보상을 하는지를 심사한다.
영국도 임대차계약 갱신 거절이 가능한 이유를 6가지로 제한하고 있다. 건물주의 사정으로 계약을 갱신하지 못하게 되면 임차인에게 고액의 보상금을 줘야 한다. 프랑스는 임대차 기간을 최소 9년 보장하며 역시 임대인은 갱신을 거절하는 대가로 임차인에게 고액을 보상해야 한다.
임대료를 올릴 때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토지나 건물에 매기는 세금이 올랐거나 토지·건물 가격이 하락했다는 등의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 인근 지역 건물들의 임대료가 올라갔는지도 조정 기준이다. 국내처럼 임대료를 건물주 마음대로 올리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프랑스도 최초 임대료는 자유롭게 정할 수 있지만 이후엔 점포의 가치가 올랐다는 증빙자료를 제출하고 상가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의 검토와 현장검증을 거치지 않으면 임대료를 인상할 수 없다.
서울시는 최근 해외의 상가 임대차 제도를 연구해 낸 보고서에서 국내 상가 임대차 기간이 너무 짧고, 계약 갱신 거절 사유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고 지적했다. 건물주가 재건축 및 개축을 이유로 계약 갱신을 거절할 경우 법원에서는 대부분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설치·운영되고 있는 상가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의 도입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서는 임대차계약 분쟁을 법원에서 다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여력이 없는 자영업자로서는 분쟁에 나서기가 부담스러운 구조다.
국내에서도 분쟁조정위 설치가 검토됐지만 지난 5월 개정된 상가임대차보호법에서 이 항목은 빠졌다. 법무법인 도담의 김남주 변호사는 “자영업자가 많은 한국 상황에서는 임대차보호법제를 강화해 자영업자들이 제대로 영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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