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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달러 시대 달라진 트렌드

여행가/허기성 2015. 10. 26. 06:29

3만달러 시대 달라진 트렌드

해외여행 가는 목적, 명품 쇼핑 → 미식 체험 변화
고급 디저트·기능성 아웃도어 등 ‘작은 사치’ 선호

 


지난 10월 14일 오후 12시 30분 현대백화점 판교점. 평일 점심시간임에도 쇼핑객들로 붐볐다. 축구장 2배 크기의 지하 1층 식품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대부분 프리미엄 가격대임에도 점심 주문을 하려는 고객들로 10m 이상 긴 줄이 곳곳에 생겼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이 없었을 때 이 사람들이 다 어디서 점심을 해결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다.

특히 이탈리, 매그놀리아, 조앤더주스 등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고급 식품 매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컵케이크전문점인 매그놀리아의 경우 오픈 5분 만에 매일 200명이 줄 서는 진풍경을 보이고 있다. 당초 하루 700개씩 만들어 판매할 계획이었는데, 고객들이 몰려 하루 4500~5000개씩 팔고 있다”며 “명품 매장을 포함한 판교점 입점 매장 900개 중 매출 10위권에 든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소득 3만달러’ 시대인 한국 소비 시장의 한 단면이다. 소득 3만달러가 넘어야 일어날 변화들이 벌써부터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내 유통업계 新트렌드는 무엇이 있을까.

 

소득 3만달러 시대를 목전에 둔 국내 유통업계에선 새로운 소비 트렌드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월 오픈한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고급 식료품 매장 ‘이탈리(좌)’와 남성 전용 미용실 ‘바버샵’을 소비자들이 둘러보는 모습.
제품 대신 경험을 산다

▶미식 여행·특급호텔 숙박 “해보자”

우리나라는 이미 ‘먹방’ 전성시대가 된 지 오래다. 미슐랭 스타 맛집만 찾아다니는 미식 여행족들은 물론 전문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직접 가정에서 시연하는 이도 늘고 있다. 여기에 맞는 와인, 사케 등을 덩달아 사고 좀 더 관심이 생기면 직접 해외 와이너리를 방문하기도 한다. 과거 해외여행 가는 목적이 주로 명품 쇼핑이었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

휴식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문턱 높다던 특급호텔 숙박도 이젠 하나의 문화가 됐다. 신라호텔, 리츠칼튼호텔서울 등 시중 특급호텔의 내국인 패키지 상품 구매 신장률은 5년 전 대비 100% 이상 늘었다. 리츠칼튼서울 관계자는 “최근 미식 경험을 중시하는 트렌드에 맞춰 호텔 숙박 외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조식, 중식, 석식을 모두 즐길 수 있는 ‘폴 인 고메(Fall in Gourmet) 패키지’를 출시했는데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 다빈치연구소장은 “소득 2만달러 시대에는 의식주 관련 소비를 비약적으로 늘리지만 3만달러 이상이 되면 ‘경험’에 투자하는 경향이 더 짙어진다”고 귀띔한다.

 

문제는 ‘삶의 질’

▶홈퍼니싱 시장, 6년 새 2배 성장

이케아, 무지, 자라홈, H&M홈, 모던하우스, 버터, 자주….

요즘 유통업계에서 바람몰이중인 홈퍼니싱(집 단장에 필요한 가구, 인테리어 제품) 브랜드들이다. 국적을 망라하고 국내 시장에서 이들 업체의 성장세는 뚜렷하다. 통계청 추산 국내 홈퍼니싱 시장은 지난해 약 12조5000억원으로 2008년 7조원대에 비해 부쩍 커졌다.

박영숙 유엔미래포럼 대표는 “과거 한국인은 외양, 체면 등 소위 ‘남의 눈’을 의식하는 소비 성향을 보였지만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점차 삶의 질, 자아실현과 관련 있는 소비로 넘어가게 된다. 최근 홈퍼니싱 시장 성장은 이런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소득이 적고 많음을 떠나 ‘작은 사치’를 중시하는 경향도 여기에 해당한다.

삼성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고급차, 명품 등 ‘빅(Big) 럭셔리’ 대신 명품 향수와 립스틱, 고급 디저트, 기능성 아웃도어처럼 ‘스몰(Small) 럭셔리’ 소비가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보고서는 “절약을 통한 소비보다 개인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소개했다.

웰빙 문화가 확산되면서 스마트헬스케어 시장은 더욱 커지는 모습이다. G마켓에 따르면 이 부문에서 올해 10월까지 누적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무려 3288%나 증가했다. “스마트밴드 등 생활, 수면 습관 등을 분석해 건강관리에 도움을 주는 다양한 스마트기기가 잇따라 출시되면서 소비자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는 게 G마켓 관계자의 설명이다.

내 개성에 사는 세상

▶콜라보레이션·자유여행 선호

아이언맨 갤럭시S6 엣지(삼성전자), 할리데이비슨 냉장고(LG전자), 카카오프렌즈 토트백(빈폴), 수묵화 캐리어(쌤소나이트), 도라에몽 립스틱(미샤), 로봇트레인 케이크(뚜레쥬르)….

요즘 유통업계 키워드는 단연 ‘콜라보레이션’이다. 평범한 제품도 유명 캐릭터나 브랜드와 만나는 순간 보다 개성적인 제품으로 재탄생한다. 이들은 주로 한정판으로 생산돼 출시하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삼성이 지난 5월 선보인 아이언맨 갤럭시S6 엣지는 119만9000원이란 높은 가격에도 1000대 한정 물량이 하루 만에 완판됐다. 한정판 콜라보레이션 마케팅은 업체 입장에선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고, 소비자는 자신만의 개성 있는 아이템을 갖게 되니 서로 ‘윈윈’이다.

소득수준이 낮을 때 소비자들은 일단 제품의 기능적 측면에 주안점을 뒀다. 하지만 소득수준이 높아진 지금은 제품의 기능은 물론, 남들과 ‘차별화’되길 바라는 소비자들의 욕망도 채워줘야 한다. 때로는 그게 조금 불편하거나 더 비싸도 소비자들은 기꺼이 감수한다.

여행업계에서 패키지 상품 대신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흐름이 대표적인 예다. 뻔한 관광지를 남들과 똑같이 둘러보기보다는 다소 품이 들더라도 숨겨진 명소를 찾아 스스로 코스를 짜는 게 더 좋다는 얘기다. 소셜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소셜커머스를 통해 자유여행을 떠나는 여행객이 최근 2년 사이에 11배 이상 증가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혼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식도락·쇼핑·관광·휴양 등 나만의 콘셉트와 일정에 맞춘 여행을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성 소비자, 유통업계 ‘뉴페이스’

▶신세계 남성전문관 매출 53% 늘어

미혼의 직장인 김승현 씨(35)의 별명은 ‘댄디남’이다. 유행에 민감한 김 씨는 매달 한두 번 백화점 남성복 매장에서 옷을 사는 게 취미다. 한 번에 20만~30만원어치씩 살 만큼 씀씀이도 작지 않다. 즐겨 찾는 매장 직원들이 그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할 정도다. 김 씨도 그런 시선을 즐기는 편이다.

“여성 못지 않은 패션 감각과 결혼을 미루면서까지 자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남성들이 핵심 소비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박지강 신세계백화점 남성의류 바이어의 분석이다. 그간 쇼핑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남성들이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올랐다. 이는 백화점 3사 남성 고객 매출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롯데·현대·신세계백화점에서 올 1~9월 남성 패션 관련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각각 21.3%, 31.9%, 52.8% 급증했다. 같은 기간 롯데백화점에서 시계·보석이나 해외 명품 부문 매출이 10%대 후반 성장한 데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세다. 특히 신세계에선 지난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기간 중 남성 매출 비중이 40%를 웃돌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백화점들은 경쟁적으로 남성 관련 매장을 늘리고 있다. 신세계는 2011년 국내 최초로 강남점에 남성전문관을 도입한 데 이어 2013년 부산 센텀시티점, 지난해 명동 본점까지 남성전문관을 신설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 7월 소공동 본점에 카메라, 키덜트 등 남성 취미 관련 상품을 선보이는 ‘맨즈아지트(Men`s AGIT)’ 편집매장을 열었다.

윤성환 롯데백화점 남성패션부문 수석바이어는 “자신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남성 고객들이 늘면서 관련 매장들의 백화점 입점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옷만 사는 게 아니다. 헤어스타일도 많이 신경 쓴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남성 전용 미용실 ‘바버샵’은 커트 4만원, 펌 12만원 등 일반 미용실보다 가격이 3~4배 비싸지만 반응은 기대 이상이다. 9월 한 달 동안 약 300명의 고객이 바버샵을 이용해 목표 대비 20% 이상 많았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40~50대 중장년층이 주로 찾는다. 앞으로 자주 방문하는 고객들을 위해 별도의 VIP 라운지에서 셰이빙, 헤어스파 등의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득 3만달러 시대 일본은

기성품에서 개인 맞춤형 상품 시대로

 

‘레저형 온천’으로 인기를 끈 일본 후쿠시마 야하타야 온천.
일본이 1인당 GDP 3만달러를 돌파한 건 1992년이다. 당시 일본 경제는 1980년대 후반 절정에 달했던 버블경제가 걷히면서 주식과 부동산이 폭락하는 등 ‘잃어버린 20년’의 초입에 서 있었다. 일본에 있어 1990년대는 사회경제적으로 불안한 시기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소득 3만달러 시대에 걸맞은 고도 소비 문화가 서서히 자리를 잡은 시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놀이·여가 부문 변화가 두드러졌다. 1989년을 대표하는 유행어 중 ‘하나모쿠’라는 말이 있다. ‘놀기에는 목요일이 가장 좋다’는 뜻이다. 이전까지 일본의 전통적인 휴일 문화가 주말에 집중돼 있었다면, 1990년대 초반부터는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여가 활동을 하기 위해 주중에 모임을 갖는 직장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수요에 맞춰 백화점, 음식점, 여행 상품 등 서비스 업종에서도 잇따라 신상품이 등장했다. 호텔의 주중 숙박 패키지 상품과 이와 연계한 여행사의 평일 여행 상품이 급증한 게 비근한 예다.

레저형 온천이 늘어난 것도 이쯤이다. 1990년대까지 일본에서 목욕탕이라고 하면 소규모의 동네 목욕탕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레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업적 투자를 통한 레저형 온천 개발 붐이 일었다. 목욕탕 시설뿐 아니라 식당, 주차장 등 각종 위락시설을 갖춘 대규모 온천 목욕탕 ‘슈퍼 센토’가 일본 각지에 등장했다. 1990년대 급증해 2009년까지 전국에 770개가 생겨났다. 근처 주민들은 물론, 자동차를 통한 자유여행객들도 즐겨 찾았다.

유형 상품 시장에선 기성품에서 개인 맞춤형 상품으로의 진화가 이뤄졌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은 획일화된 유행보다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개인화에 대한 욕망이 커지기 시작한다. 이는 산업 전반에서 맞춤형 상품 수요 증가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 시장에선 소비자가 원하는 곡만으로 구성된 음반이나 절판된 음반 등을 주문 생산해주는 소니뮤직의 ‘오더 메이드 팩토리’ 서비스가 등장했다. 소비자 취향에 맞는 기타를 주문 제작해주는 악기 브랜드 ‘BLADE’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를 모토로 개인 맞춤형 구두 ‘오더 슈즈’를 주문·제작해주는 업체들도 속속 나타났다.

‘뉴 리치(New Rich·신흥 부호 세력)’가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른 점도 특기할 만하다.

매일 상장기업 사장과 식사를 하는 연봉 3억엔(약 30억원)의 여성 펀드매니저, 스톡옵션으로 갑자기 수억엔 단위의 돈을 손에 쥐게 된 계약직 여성 사원, 절세를 위해 한 기에 50억엔(약 500억원)을 호가하는 전용기를 구입하는 기업가,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미국의 슈퍼마켓 체인점을 구매하는 기업 오너 등이 ‘뉴 리치’에 해당한다. 이들은 물건을 구입할 때도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희귀성을 고집하며, 만족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비싸도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엶으로써 소비 패턴의 변화를 주도했다.

뉴 리치에는 못 미치지만, 뉴 리치를 선망하는 대중을 위한 상품도 유행했다. 합리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아니면 적어도 양질의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디퓨전 브랜드’가 큰 인기를 끌었다. 디퓨전 브랜드는 보급, 확산, 배포 등을 뜻하는 ‘디퓨전(diffusion)’에서 유래한 말로 뉴 리치를 위한 최고급 브랜드의 보급형 버전이다. 유통업계는 고급화를 통해 소수의 VVIP 고객을 확보하는 동시에, 디퓨전 브랜드를 내세워 충성도 높은 일반 고객을 사로잡고 수익성도 동시에 확보했다. 유명 셰프들은 자신의 레스토랑을 다양한 가격대의 매장으로 나눠 개업함으로써 고객층을 다변화했다.

1990년대 일본의 이 같은 소비 트렌드 변화를 정리하면, 한마디로 ‘상품 구매에서 체험 구매’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경제가 성장하고 삶의 질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등장한 트렌드는 최근 소득 3만달러 시대를 목전에 둔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