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옆에서 24시간
절망했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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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8일 새벽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침낭 속에 한뎃잠을 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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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새벽 1시 평화의 소녀상 옆. 거리에 은박 깔개를 깔고 그 위에 매트를 덮었다. 이제 전기장판을 찾을 차례다. 영하 6도의 날씨. 오전 9시부터 16시간을 꼬박 소녀상 옆에서 취재했다.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24시간 현장 취재고 뭐고, 어서 빨리 전기장판 위 침낭에 들어가고 싶었다. 곧 대학생들한테서 절망적인 얘기가 들려왔다.
"전기장판이 모자라요."
눈에 불을 켜고 노숙 물품더미를 샅샅이 뒤졌더니, 전기장판이 나왔다. "어라, 전원 코드가 없어요." 필사적으로 다시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전기장판은 여학생들에게 양보하고 기자를 비롯한 남자들은 매트 위에 몇 겹의 이불을 깔고 침낭을 폈다. 핫팩을 양쪽 양말 안으로 넣었다. 2개의 핫팩을 손에 들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올겨울 가장 고단한 하루를 보낸 만큼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느 순간 깼다. 몸이 덜덜 떨렸다. 침낭 밖에 얼굴을 빼꼼 내미니, 아직 깜깜한 새벽이다. 소녀상 앞 일본대사관 터에서 중장비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억지로 눈을 붙이려 노력했다.
자고 싶어도, 더 잘 수가 없을 정도로 춥다고 느꼈을 때 일어났다. 새벽 6시 30분. 한 여고생이 '박근혜 정부는 경술국치 재현 말고 석고대죄하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어젯밤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노숙을 하겠다며 불쑥 찾아온 학생이었다. 밤을 꼬박 지새운 뒤, 팻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후 일어난 대학생들은 출근길 시민을 상대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부당함을 알리는 1인 시위에 나섰다. 오전 9시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과 함께 한 지 24시간이 흘렀다. 돌아가는 길, 취재수첩을 살폈다. 많은 이들이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많은 기록 중 6개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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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노숙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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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①] 스무 살을 경찰서에서 시작하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2길. 평화로라고 더 많이 불리는 이곳에 소녀상이 있다. 앉은키 130cm의 단발머리 소녀의 마음은 어지럽다. 그 자리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일본은 지난달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소녀상 이전을 정해진 일로 보고 있다.
합의문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함'이라고 명시돼있다. 우리 정부가 소녀상 이전을 약속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소녀상 이전은 민간단체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있지만, 정부 말을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위안부 합의 이후 한 달이 지났지만, 소녀상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녀상 지킴이 대학생들 덕분일 것이다. 위안부 합의 이후 첫 수요시위가 열린 지난달 30일부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학생들은 교대로 한뎃잠을 잔다. 오전 9시에 교대한다.
기자가 찾은 1월 27일 오전 9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게 분명한 기색의 학생들이 몸을 일으켰다.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친다. 곧 팔팔한 학생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오늘 함께 24시간을 보낸다"라고 하자, 깜짝 놀라는 눈치다. 청년단체 '청년하다'에서 활동하는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에게 춥다고 엄살을 피우자, 전기장판 쪽에 앉으란다. 이양선(20)씨는 "저는 '히트택'을 입고 왔다"며 깔깔 웃었다. 오늘 처음 소녀상 지키기 노숙농성을 한다고 했다. 한껏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선배를 따라온 철없는 대학 새내기 아닐까. 양선씨는 지난달 31일 일본대사관 기습시위로 스무 살의 첫날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고 했다. 멋모르는 건 나였다.
- 무섭지 않았어요?
"일본이 '미안, 이제 됐지?' 하는 식의 사과 방식은 잘못됐잖아요. 많이 화가 났어요.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간 게 아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고, 떳떳했어요."
경찰 조사는 배후 찾기에 바빴다. "누가 교육을 시켰나", "누가 주동자인가"라는 경찰의 물음에 양선씨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서에서 48시간을 보낸 뒤 나올 때, "태어나서 이렇게 당당하게 나온 건 처음이었다"라고 했다.
-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아요.
"경찰서에서 나온 뒤 엄마랑 통화하는데, "두부 먹었어?"고 물으셨어요. 그 말에서 걱정이 묻어났어요."
그 길로 고향 울산에 내려갔다. 엄마한테 "내 이익을 좇기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딸의 신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②] 배후를 찾다
1시간이 지나니, 다리가 저려왔다. 영하의 거리에서 전기장판의 힘은 제한적이다. 그런데 대학생들은 힘들지 않단다. 즐겁단다.
쌍화탕 네 박스가 배달됐다. 쌍화탕뿐이랴. 따뜻한 커피는 셀 수 없었고, 햄버거·피자·치킨·김밥·토스트 등 각종 먹을거리가 배달됐다. "필요한 거 없느냐"고 묻는 많은 시민들을 돌려보냈는데도, 농성장 한 편에 다 소화하지 못한 먹을거리가 쌓여갔다. 점심때는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와서, 학생들에게 따끈한 북어국밥을 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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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낮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대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이날 점심은 '성동구 중구 엄마들 모임'(성중맘)의 밥차가 마련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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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대학생 이태우(27)씨가 시민들이 후원금을 마련해 제작한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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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생들이 가장 맛있게 먹었던 건 25일에 배달된 피자였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은 배달원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냈다. 전화를 했더니 여중생이었다. 대학생들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니, 이 여중생은 "페이스북으로 대학생들이 밤새 소녀상 옆에서 지키는 걸 보고 도움 될 일이 없을까 해서 간식을 보내드렸다"라고 말했다.
대학생들이 비싼 피자라고 걱정을 하자, 이 학생은 "저도 처음 먹어본 피자였는데..."라며 쑥스러워했다. "용돈도 많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에, 이 학생은 "어떤 아주머니께서 후원금을 주셔서 피자를 샀다"라고 까르르 웃었다. 대학생들은 전화통화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대학생대책위원회 상황실에서 일하는 이태우(27)씨는 식권 뭉치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소녀상 사진과 함께 '힘내서 소녀상을 꼭 지켜주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누군가가 프린터로 뽑아 오려 만든 식권이었다. 태우씨의 말이다.
"거리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얼마 전 몇몇 시민들이 돈을 모아 식권을 만들어주셨어요. 주변 식당에 120만 원가량 내고 식권을 만든 거예요. 식권 한 장 내면 7000원짜리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힘이 납니다. 큰 감동입니다."
[기록③] 정권이 원하는 것
"왜 텐트 안쳐요?"
한 시민이 농성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묻는 이가 여럿이었다. 소녀상 옆에 텐트를 칠 수 있다는 기사가 나왔던 탓이다. 실제로는 소녀상에서 20m 떨어진 곳에서 텐트를 설치할 수 있다. 소녀상 지킴이를 자처한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소녀상 주변엔 경찰버스가 포위하듯 지키고 서있다. 많은 경찰이 소녀상 주변을 감시했다. 경찰은 학생들의 방한 용품 반입을 막고 있다. 학생들은 당초 농성장에 침낭, 텐트, 천막을 들이려고 했다. 경찰은 불법 시위 용품이라며 막았다. 학생들의 항의에 침낭만 허용했다. 대학생 대책위 상황실장 정수연씨의 말이다.
"우리 대학생들도 '춥고 힘든데 매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노숙농성을 시작했어요. 경찰도 천막, 텐트 등을 허용하면 농성이 장기화될 수 있으니까 (학생들이) 알아서 그만두도록 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돼요."
수연씨 추측이 맞다면, 경찰의 판단은 오판이다. 수연씨는 "이미 1000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노숙농성을 했고, 2월에도 지역에서 많은 학생들이 올라온다. 대학생들은 즐겁게 노숙농성을 하며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힘들어서 포기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활동 범위를 넓힌다. 2월에는 소녀상 지키기를 넘어, 한일 합의 전면무효 활동을 펼쳐 나간다.
* 소녀상 지키는 대학생들과 24시간, 그 6가지 기록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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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앞에 놓인 핫팩에 한 '꼬마 손님'이 붙인 쪽지가 눈에 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