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차 산업을 견인하다, 시발자동차의 추억
한국전쟁 때 죽고 다친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전국 차량의 75%인 1만2천대가 망가졌다.
54년 국제차량제작사 최무성, 혜성, 순성 3형제는 고물차를 수리하는 기술로 명성을 떨친다. 기자 출신이었던 맏형이 어느 날 말했다. “야, 우리. 만날 망가진 차 부품을 꿰맞출 게 아니라, 직접 차를 만들면 어떨까?” 전설적인 시발(始發)자동차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수리하는 것과 차를 만드는 건 전혀 달랐다. 가장 큰 문제는 엔진이었다. 이때 ‘엔진의 전설’ 김영삼(전직 대통령은 아니다)이 등장한다. 교회의 야간학교에서 한글과 일본어를 깨친 그는 도쿄의 기계설계 학원에서 만든 강의록을 구해 독학을 했다. 그러다가 일본에 직접 건너가 당시의 엔진 공학을 섭렵한다. 원산서 주물공장을 해서 ‘함경도 아바이’로 통했던 그는 53년 최씨3형제를 만났고, 의기투합해 ‘시발’ 제작에 합류한다.
김영삼은 엔진을 직접 만들 결심을 한다. 용산의 원효로 주물공장에서 쇳물을 부어만든 야심작을 조립해 시동을 걸었다. 처음엔 엔진 블록이 고열에 깨지고 그 다음엔 실린더 헤더가 갈라졌다. 열한 번의 실험 끝에 이 의지의 한국인은 55년 국산엔진 제 1호를 탄생시킨다. 이 해 여름, 드디어 국산 심장을 장착한 ‘시발’ 이 등장했다. 55년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한대 8만환 하던 6인승 시발은 30만환대로 뛰었다. 택시회사에서도 500여대를 사갔다. 회사 앞에선 차를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로 붐볐다. 부잣집 부인들은 계(契)를 조직해 구입을 한 뒤 프리미엄을 붙여 파는 ‘시발투기’를 하기도 했다. 광고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 인기 자동차는, 가다가 가끔씩 이유없이 서기도 했고, 부품이 갑자기 달아나 어이없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
시발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61년 5.16 이후 일제 닛산의 블루버드를 수입한 ‘새나라자동차’가 등장한다. “엔진소리도 조용하고 매끈한 새나라는...왕년의 노장 시발을 비웃으며 요염한 모습으로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63년의 기사다. 전란의 폐차를 모아 만든 ‘땜질명차’ 시발은 이렇게 사라져갔다. 최근 일산의 서울모터쇼에선 55년산 ‘시발’이 등장했다. 한편 몇년 전 국립민속박물관이 거의 원형을 유지한 78년식 포니1을 한 애차가(愛車家)로부터 사들여 화제가 됐다. 시발과 포니1 없이 우리가 자동차강국이 될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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