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민간건설 공공임대아파트의 나쁜 사례들이 모여 있는 종합병원인 꼴이죠. 처음부터 대량 미분양 사태가 터졌고 입주한지 2년 만에 건설업체가 고의에 가까운 부도를 냈죠. 이어진 경매에서는 유령회사가 불쑥 튀어나와 매물로 나온 아파트 물량을 고가에 일괄낙찰 받아 기존 입주민들은 집에서 당장 쫓겨날 판이에요. ”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차항리에 있는 민간 공공임대아파트 유덕휴먼빌의 피해주민대책위원회(이하 주민대책위) 박영한 공동위원장이 한숨처럼 내뱉은 말이다.
이곳 임대아파트의 갖가지 부실 부패 사례들이 정부 기관에 보고된 후 정부는 6월초 입주민들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하는 등 긴급대책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책의 실효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 근본 원인으로 수요가 없는 곳에 임대아파트를 건설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민간 공공임대아파트 =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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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덕휴먼빌은 읍내에서도 한참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었다. |
영동고속도로 횡계IC에서 나와 작은 규모의 번화가를 지나쳐 구불구불한 왕복 2차선 도로로 15분 이상 달리면 도착하는 곳에 유덕휴먼빌이 있었다. 주변의 낮은 구릉과 논밭 사이에서 우뚝 선 유덕휴먼빌 4개 동. 입구에 내걸린 ‘슈퍼’라는 간판이 생뚱맞게 느껴질 정도다.
이미 2년전 인근에 900세대 규모로 지어진 ‘ㄷ’ 아파트까지 포함하면 인구 3000명이 사는 곳에 1200세대의 아파트가 새로이 들어선 셈이다.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민간 공공임대아파트에 들어가 살아도 될 정도죠.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임대아파트들을 그렇게 많이 지었는지…” 주민대책위 공동위원장의 한 명인 김대기(51) 위원장의 말이다.
정확한 수요를 예측하지 못한 임대아파트는 분양이 저조했고 이는 건설업체의 부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덕휴먼빌의 경우, 2001년 12월부터 부도 전까지 분양된 가구수는 전체 299세대 가운데 모 여행사가 13세대를 일반분양 받았고 43세대가 3000만원에서 3600만원의 보증금을 내고 임대분양을 받았다. 6세대 중 5세대가 비어있었던 셈이다.
그나마 3000여 만원이었던 임대보증금이 건설업체 부도 이후 500~1200 만원으로 급락하자 인근 지역에서 고랭지 채소재배와 건설노동자 등 일용노무자들이 싼 맛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래도 100~150세대 정도는 꾸준히 공실로 남았다.
평창군의 다른 주요 아파트도 상황은 비슷했다. 같은 도암면 횡계리에 있는 ‘ㄷ’아파트는 1998년 5월5일 입주를 시작했고 2000년 12월 21일 파산했다. 인근 진부면 송정리에 있는 ‘ㅅ’아파트도 같은해인 1998년 5월20일 입주, 1999년 1월8일 파산하고 말았다.
건설교통부의 자료에 따르면 9월 현재 준공 후 부도임대아파트 사업장은 389개 사업장에 6만9050세대. 이 가운데 경매가 예정됐거나 진행 중인 사업장은 211개, 3만4450세대다.
김 공동위원장은 “오죽하면 ‘민간 공공임대아파트=부도’라는 공식이 나왔겠냐”며 “지금까지 방식대로 민간 공공임대아파트를 짓는다면 수도권은 몰라도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지방은 빈 집 투성이에 부도가 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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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평창군 도암면에는무려 900세대 규모로 지어진 'ㄷ'아파트도 있다. 이 아파트 역시 2000년 12월 파산했다. |
감사원도 지난 7월 ‘임대주택 건설 및 관리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임대주택 수요도 조사하지 않은 채 수요가 적은 대도시 외곽지역이나 지방 중소도시에 임대주택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해 대량 미임대 사태가 우려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지난 2002년 수립된 ‘국민임대주택 100만호’ 건설계획에 따라 추진하고 있는 물량 가운데 생활권별로 최대 8.85배나 되는 과도한 물량이 계획되고 있다. 민감 임대아파트뿐 아니라 국민 임대아파트 또한 수요 없는 곳에 과다한 공급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월세, 일일 숙박...스키 시즌에는 콘도로 변신’
유덕휴먼빌을 건설한 유덕건설이 부도가 난 후에도 분양률은 여전히 저조했다. 급기야 아파트 관리를 맡은 유일개발은 빈집들을 콘도로 운용했다. 유일개발은 부도난 유덕건설의 자회사로 임대아파트로 숙박업을 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마침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용평스키장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잇점 때문에 아파트의 콘도 운용은 그럭저럭 잘 되는 편이었다. 이에 임대보증금을 자칫하면 떼일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입주민들까지 숙박업에 합류했다. 유일개발과 수익을 반으로 쪼개기로 약정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입주민들은 월세를 놓거나 일일 숙박도 받았고 눈이 올 때쯤이면 스키 시즌방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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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청장년이 임의로 구성한 주민회의 측에서 수도관을 떼어내 수돗물 공급을 끊은 모습. |
그러나 입주민 대표 김 아무개씨가 수익금 관리를 하면서 입주민들은 관리비만 떠 안은 채 수익은 얻지 못했다. 한 시즌만 해도 수천만원 이상의 수익이 났지만 입주민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400만원이 전부였다.
박 공동위원장은 “분양도 안 되고 보증금도 못 받을 것 같은 상황에서 오죽했으면 월세에 시즌방까지 꾸렸겠냐”며 “민간 건설업체 고의 부도에 농락 당하고 같은 입주민에게 속아 이젠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고 한탄했다.
아파트 관리가 전혀 되지 않자 급기야는 부패한 입주자 대표와 결탁한 것으로 보이는 지역 청년들 몇명이 무단으로 아파트에 들어와 살기도 했다. 이들은 관리비를 내지 못하는 40 여 세대의 전기를 끊는 등 주민들을 고통에 몰아 넣었다.
서대균(55) 전 아파트관리소장은 “변기에 인분 썩는 냄새가 여기저기서 났다”며 “결국 견디지 못 한 세대들이 점차 아파트를 떠나고 있다”고 전했다.
‘유령회사가 경매에서 일괄낙찰…투기바람?’
부도난 유덕휴먼빌은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수차례 경매 처분에 오르내렸다.
지난 4월25일 2차 경매에 이어 3차 경매가 오는 10월17일 예정돼 있다. 하지만 유덕휴먼빌을 놓고 근저당 설정권자인 국민은행과 서울상호저축은행, 피해 입주민들 사이에서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경매에서는 경매 6일 전인 4월19일에 설립된 ‘대한투경’이라는 회사가 예상 입찰가보다 훨씬 높은 액수를 써내 269세대를 일괄낙찰 받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경매 입찰이라도 바랐던 입주민들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박 공동위원장은 “불과 며칠 전에 생긴 회사가 총액 110억에 가까운 돈을 써내 입찰을 받았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며 “대한투경은 서울상호저축은행과 유일개발 등이 짜고 만든 유령회사라는 의혹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대한투경은 낙찰가의 10%만 납입한 채 추가 납입을 하지 않아 다음달 경매가 다시 열리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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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주민들이 아파트 통로 창문에 전세보증금 관련한 '대법원판례'를 붙여놓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
하지만 경매를 통해 입주민들, 특히 업체 부도 이전에 3000만 이상 임대보증금을 내고 임대분양을 받은 43세대는 1800만원 이상 손해를 보게됐다.
경매에서 집이 팔려도 임대보증금은 1200만원(지방기준, 수도권은 1600만원)까지만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덕휴먼빌에 40억원 이상을 대출해준 2순위 서울상호저축은행이 이들 세대에 대한 경매를 다시 중복해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박 공동위원장은 “내년이면 평창이 차기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서울상호저축은행이 세대별로 6000~7000에 입찰해 일괄 낙찰 받고 이를 다시 재분양해 결국 주변 시세까지 끌어올리는 투기효과까지 발생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상호저축은행 관계자는 “평창의 개발 가능성을 보고 이번에 일괄 낙찰을 시도해 차후 제값을 받고 매각하려는 것은 맞다”며 “40억원 이상의 손실은 제2금융권 은행으로서 치명적이기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은행이 운용하는 국민주택기금 외에 다른 금융기관이나 사금융에 의한 담보 또한 저당권 설정에서 당해 임대아파트를 설정하는 것 또한 불법이다.
결국 근저당권자인 금융 기관의 이익은 경매를 통해 보전이 되지만 우선적으로 경매에 참여할 수 없는 임차인들만 부도로 인한 손해액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것이다.
“5천만원 빌려 준다더니 말로만?...정부는 매입임대 정책으로 전환해야”
3000만원의 임대보증금을 내고 살다가 지난 2월 경매에서 집이 낙찰돼 쫓겨난 김성태(41)씨. 그는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에 가면 국민은행에 알아보라고 하고 국민은행에 가서 문의하면 법원으로 또 미룬다”며 “당장 돈이 필요해 정부가 말한대로 서류를 가져가 대출을 받으려 해도 기존 대출이 있다고 안 된다고만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유덕휴먼빌의 잔여 경매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임대보증금 구제한도 1200만원은커녕 십원짜리 한장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교부가 지난 6월 대책 이후 8월22일 내놓은 세입자 보호대책 가운데 입주자 희망에 따라 3% 저리에 최대 5000만원까지 대출해주겠다는 약속이 공염불이 된 셈이다.
건교부는 ‘부도임대아파트 정리전담팀’을 구성하고 지난 6월20일부터 한달 간 부도임대아파트 현장 실태조사를 실시, 7월에는 임차인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하는 임대주택법 개정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실태조사에 이어 건교부는 각 부도임대아파트 및 입주자의 상황을 유형별로 분류해 ▲분양전환 ▲경락참가 ▲주거이전 등 가장 효과적인 지원방안을 선택해 지원하겠다고도 밝히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효과는 미지수다.
우선매수권은 부도 아파트가 경매에서 낙찰되지 않을 경우에만 임차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무늬만 우선 매수권일뿐 실질적인 권리는 없는 셈이다.
이에 전국임대아파트연합회(이하 임대련)측은 민간임대활성화정책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장봉화 임대련 정책국장은 “민간 부도임대아파트의 온갖 폐해는 잘못된 수요예측에서 기인한다”며 “주택보급률이 경북과 전남이 올해 8월 기준으로 이미 140%가 넘는 등 특히 지방에는 임대아파트 수요가 없음에도 민간임대 활성화정책을 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장국장은 “기존 건설계획에 따라 민간 건설업체가 주도하는 과다한 공급이 이뤄질 경우 차후 투입된 국민주택기금과 임차보증금을 회수하지 못 해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기금의 사용을 건설업체 등 공급자에서 임차인 주거비 위주로 전환하고, 매입임대를 통해 기존의 주택들을 재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