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앞으로 다가온 2007 대선 여론조사… 서울 40대 500명에게 묻다…이명박 55% 초강세 지지, 정책 추진 능력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해를 넘기면 큰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만 19살 이상이라면 누구나 치르는 시험이다. 기분대로 마구 휘갈길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시험장에 들어설 때까지 무척 힘들게 한다. 그놈이 그놈이라며 무관심하다가도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또 고민하고 열망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실존적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박근혜 15.1%, 고건 14.4%
<한겨레21>은 40대에 주목했다. 특정 연령층의 특성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다수는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40대의 상당수는 피가 뜨거울 때 1987년 6월항쟁을 겪었고 그해 겨울 대선에 참여했다. 5년 뒤 입장과 처지가 달라진 같은 후보를 놓고 다시 투표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찬바람을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정치 권력이 교체됐다. 그리고 이들은 2002년 참여정부 탄생의 주역이 됐다. 1987년 스무 살 청년은 2007년 불혹의 나이가 됐다. 스물아홉은 쉰을 바라본다. 이들은 대부분 가장이며 생계를 책임지는 생활인이다. 집과 자녀 교육을 고민하고 있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중추세력의 몫을 하고 있다. 그만큼 어깨도, 마음도 무겁다.
40대는 목소리가 크다. 효율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연령층인데다, 30대와 50대의 일반적 특성이 40대의 앞뒤에 녹아 있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와 선거 전문가들도 40대의 힘을 주목한다. 그 힘은 파급력이다. 지난 두 차례의 대선에서 정권 교체와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선택한 이들의 민심이 다음 선거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2007년 차기 대통령 선거 투표일은 12월19일이다. <한겨레21>은 대선을 1년 남짓 남겨둔 시점에 서울에 사는 40대의 민심을 살펴봤다. 서울이라는 조건은, 네 차례의 대선을 거치면서 약화됐지만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역감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어서 추가됐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12월5~6일 전화면접 방식으로 500명을 조사했다. 이번 조사의 오차한계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이다.
이번 조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이명박 대세론’의 견고함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예전 대세론의 주인공들이 주로 때 묻지 않은 신선함이나 바람에 의한 것이었던 반면, 이명박 대세론은 실체가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만큼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 전 시장은 서울의 40대를 상대로 한 이번 조사에서 지지도가 55.0%까지 치솟아 경쟁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15.1%)와 고건 전 국무총리(14.4%)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전체 성인(1천 명)을 대상으로 한, 같은 기관의 11월7일 조사에 비해 이 전 시장은 17.9%포인트가 올라간 반면, 박 전 대표와 고 전 총리는 각각 8.4%포인트, 7.1%포인트가 빠졌다. 이 전 시장이 지난해까지 서울시장을 지냈고 그의 눈에 보이는 ‘업적’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격차가 눈에 띄게 많이 벌어졌다. 서울에 사는 40대들에게 이 전 시장의 이미지가 다른 대선 주자들에 비해 강하게 각인돼 있고, 지역이 곧 정치적 자산이던 3김 시대 때의 ‘맹주’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전 시장에게는 서울이 탄탄한 지역 기반이 된 것이다.
지지자 62.6% “계속 지지할 것”
이번 조사에서는 대선 주자들의 지지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물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 누가 가장 적합하냐는 같은 물음에, 처음엔 응답자들이 직접 이름으로 답하도록 했고 두 번째엔 보기를 불러줬다. 앞에 언급한 이 전 시장의 지지도 55%는 두 번째인 ‘폐쇄형’ 방식 조사다. 응답자들이 직접 대선 주자의 이름을 대는 일종의 주관식인 ‘개방형’ 방식에서 “이명박”을 꼽은 이들은 500명 가운데 196명이었다. 고 전 총리와 박 전 대표는 각각 45명, 40명이었고, 나머지 대선 주자들은 모두 한 자릿수에 그쳤다.
같은 질문을 굳이 방식을 달리해 물어본 이유는 개방형 방식이 대선 주자 지지 강도를 측정하는 데 참고가 되기 때문이다. 꼭 같지는 않지만 진열대 위의 여러 상품을 비교해보고 고르는 방식과 매장에서 특정 상품을 콕 집어서 고르는 방식 정도의 차이가 있다.
좀더 직접적으로 대선 주자들의 지지 강도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 지지하고 있는 후보를 내년 대선까지 계속 지지할지 여부를 물었다. 전체 응답자의 55.2%는 “계속 지지할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전 시장 지지층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62.6%로 올라간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76.6%)이나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74.0%)보다는 낮지만, 현 시점에서 실질적 경쟁자인 박 전 대표(56.2%)나 고 전 총리(47.2%)에 비해 높았다. 이 전 시장의 지지층이 상대적으로 탄탄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개방형 설문 방식에서 이름을 콕 찍어 답변한 이들이나 “계속 지지할 것 같다”는 응답자들은, 지지를 철회할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상당 기간 지속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전 시장이 서울의 40대들 사이에서 ‘나 홀로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이 전 시장이 ‘잘했다’. 과거의 정치가 여의도를 중심으로 정치권 내에서 세를 불리는 방식이었다면,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는 패턴이 달라졌다. 자기 나름의 브랜드와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한층 중요해졌다. 자신의 메시지를 공격적으로 마케팅하는 자가 주목받고 살아남는다. 이 전 시장은 현재 거론되는 대선 주자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공격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반도 대운하’ 공약(경부운하를 포함해 다른 지역의 운하까지 개념을 확장하면서 이 전 시장 쪽에서 새로 붙인 이름)이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이 시작되기도 전에 큰 구상이 아닌 구체적인 공약부터 내놓는 대선 주자는 없었다. 한나라당의 경쟁자들은 물론 열린우리당도 ‘건드리면 커질까봐’ 검증과 공격을 주저하던 오랜 시간 동안, 이 전 시장은 혼자 ‘장사’를 잘했다. 이는 청계천이나 대중교통 체계 개편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핵심인 언론의 시선을 당길 줄 알았다.
“정몽준 지지층이 이명박에게”
둘째, 국민들이 정치인의 어떤 점을 보고 지지(혹은 투표)할 것인지 기준도 달라졌다. 이번 조사의 응답자들이 밝힌 특정 후보 지지 이유는 ‘정책 추진 능력(57.4%) → 도덕성과 참신함(26.7%) → 정책과 이념 노선(13.4%)’ 순이었다. 2002년 대선 당시 후보를 고른 기준은 ‘도덕성과 참신함(43.0%) → 정책과 이념 노선(23.7%) → 정책 추진 능력(19.7%) → 소속 정당(12.3%)’ 순이었다고 답했다. 이 전 시장 지지층으로만 좁혀보면 정책 추진 능력 부분이 84.7%까지 올라간다. 이는 이 전 시장의 이념 노선이나 도덕성보다는 능력에 대한 기대가 지지도를 떠받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경제 성장과 추진력이라는, 상품으로 치면 명품 브랜드를 달았다. 명품 브랜드는 단점을 막아주는 방패로도 기능한다. 15대 국회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경력도, '서울 봉헌 발언'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기업을 운영했던 사람이 깨끗하게만 살았겠어?’ 하는 식으로 앞으로 터져나올지도 모를 개인적인 문제에 미리 관대해질 준비까지 하고 있다.
셋째, 이전 대선에서 나타났던 전통적인 대결구도가 무너졌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이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무능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 대표적인 예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했던 응답자의 50.2%가 이 전 시장 지지로 옮겨갔다. 조사를 담당했던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한귀영 연구실장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지지층은 후보 단일화(11월25일) 이전부터 노무현을 지지했던 층과 단일화 이전에는 정몽준을 지지했으나 단일화 이후 노무현 지지로 선회한 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며 “합리적 성향의 보수층인 정몽준 지지층이 현재 이명박 지지층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념 지형상 진보나 보수의 한 축에서 중도를 향해 나아가는 게 일반적인데, 이명박은 중도에서 시작해 높은 지지를 등에 업고 한나라당의 전통 지지층을 공략하고 있는 방식으로 지지도를 높여가는 최초의 사례일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한나라당에 덧씌워진, 수구꼴통, 부패 등 부정적 이미지는 이 전 시장을 별로 구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세론이 내년 대선까지 거침없이 이어질 것으로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결정적인 시기에 날개가 꺾인 과거의 대세론에 비해 탄탄하다고는 하지만, 반전을 거듭해온 이전 ‘대선 드라마’를 보면서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세론은 여권발 정계 개편과 한나라당 경선이라는 두 차례의 고비를 거치면서 그 견고함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이 전 시장이 제시할 비전이다.
역순으로 짚어보면, 이 전 시장의 대표상품인 ‘한반도 대운하’는 그의 이미지를 강화해주기는 하지만 시대정신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명확하게 제시한 적은 없지만, 서울시장 퇴임 이후 수십 차례 진행한 강연에서 이 전 시장이 강조한 것을 모아보면 선진화 혹은 제2의 국운 융성 정도가 될 것 같다. 점수는 유권자가 표로 매긴다.
이명박 경선 통과가 불확실하면?
한나라당 경선은 당심과 민심이 절반씩 섞이는 국민참여경선 방식으로 대선일 6개월 전에 치르도록 돼 있지만 시기와 방식 모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1등을 다투는 박근혜 전 대표가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층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이명박 전 시장은 당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서울의 40대를 상대로 조사한 이번 조사에서도 뚜렷하게 차이가 났다. 지지하는 후보가 소속 정당의 후보로 선출되지 못할 경우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에, 절반이 넘는 62.4%가 정당에 관계없이 그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인물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인물에 관계없이 같은 정당 소속 후보를 택하겠다는 응답자는 23%, 투표를 포기하겠다는 응답자는 13.3%로 나타났다. 특히 이 시장의 지지층은 이 시장이 후보로 선출되지 않을 경우 같은 당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이 19.5%로,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층(34.7%)보다 낮게 나왔다. 이는 이 전 시장이 당내 경선에서 탈락할 경우 그의 지지층이 한나라당을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선 통과가 불확실할 경우 이 전 시장의 중층적인 지지층은 경선 즈음에 다른 선택을 강요할 수도 있다.
여권발 정계 개편은 현재 수준에서는 종잡을 수 없다. 갈등을 빚으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놓고 프로야구식(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코리안시리즈)으로 흩어져 있는 지지층을 통합해나가는 가운데 유력한 대선 주자가 부상하지 않겠느냐는, ‘설’이 설왕설래하고 있는 정도다.
다만 이번 조사에서 범여권이 가질 단 한 가닥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다음 대선 주자를 고르는 유권자의 시선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응답자의 74%가 후보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을 기준으로 투표할 것 같다고 답했다. 현 정부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투표할 것이라는 응답은 24.7%에 불과했다.
반전은 대선의 법칙?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해를 넘기면 큰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만 19살 이상이라면 누구나 치르는 시험이다. 기분대로 마구 휘갈길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시험장에 들어설 때까지 무척 힘들게 한다. 그놈이 그놈이라며 무관심하다가도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또 고민하고 열망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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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15.1%, 고건 14.4%
<한겨레21>은 40대에 주목했다. 특정 연령층의 특성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다수는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40대의 상당수는 피가 뜨거울 때 1987년 6월항쟁을 겪었고 그해 겨울 대선에 참여했다. 5년 뒤 입장과 처지가 달라진 같은 후보를 놓고 다시 투표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찬바람을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정치 권력이 교체됐다. 그리고 이들은 2002년 참여정부 탄생의 주역이 됐다. 1987년 스무 살 청년은 2007년 불혹의 나이가 됐다. 스물아홉은 쉰을 바라본다. 이들은 대부분 가장이며 생계를 책임지는 생활인이다. 집과 자녀 교육을 고민하고 있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중추세력의 몫을 하고 있다. 그만큼 어깨도, 마음도 무겁다.
40대는 목소리가 크다. 효율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연령층인데다, 30대와 50대의 일반적 특성이 40대의 앞뒤에 녹아 있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와 선거 전문가들도 40대의 힘을 주목한다. 그 힘은 파급력이다. 지난 두 차례의 대선에서 정권 교체와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선택한 이들의 민심이 다음 선거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2007년 차기 대통령 선거 투표일은 12월19일이다. <한겨레21>은 대선을 1년 남짓 남겨둔 시점에 서울에 사는 40대의 민심을 살펴봤다. 서울이라는 조건은, 네 차례의 대선을 거치면서 약화됐지만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역감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어서 추가됐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12월5~6일 전화면접 방식으로 500명을 조사했다. 이번 조사의 오차한계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이다.
이번 조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이명박 대세론’의 견고함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예전 대세론의 주인공들이 주로 때 묻지 않은 신선함이나 바람에 의한 것이었던 반면, 이명박 대세론은 실체가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만큼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 전 시장은 서울의 40대를 상대로 한 이번 조사에서 지지도가 55.0%까지 치솟아 경쟁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15.1%)와 고건 전 국무총리(14.4%)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전체 성인(1천 명)을 대상으로 한, 같은 기관의 11월7일 조사에 비해 이 전 시장은 17.9%포인트가 올라간 반면, 박 전 대표와 고 전 총리는 각각 8.4%포인트, 7.1%포인트가 빠졌다. 이 전 시장이 지난해까지 서울시장을 지냈고 그의 눈에 보이는 ‘업적’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격차가 눈에 띄게 많이 벌어졌다. 서울에 사는 40대들에게 이 전 시장의 이미지가 다른 대선 주자들에 비해 강하게 각인돼 있고, 지역이 곧 정치적 자산이던 3김 시대 때의 ‘맹주’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전 시장에게는 서울이 탄탄한 지역 기반이 된 것이다.
지지자 62.6% “계속 지지할 것”
이번 조사에서는 대선 주자들의 지지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물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 누가 가장 적합하냐는 같은 물음에, 처음엔 응답자들이 직접 이름으로 답하도록 했고 두 번째엔 보기를 불러줬다. 앞에 언급한 이 전 시장의 지지도 55%는 두 번째인 ‘폐쇄형’ 방식 조사다. 응답자들이 직접 대선 주자의 이름을 대는 일종의 주관식인 ‘개방형’ 방식에서 “이명박”을 꼽은 이들은 500명 가운데 196명이었다. 고 전 총리와 박 전 대표는 각각 45명, 40명이었고, 나머지 대선 주자들은 모두 한 자릿수에 그쳤다.
같은 질문을 굳이 방식을 달리해 물어본 이유는 개방형 방식이 대선 주자 지지 강도를 측정하는 데 참고가 되기 때문이다. 꼭 같지는 않지만 진열대 위의 여러 상품을 비교해보고 고르는 방식과 매장에서 특정 상품을 콕 집어서 고르는 방식 정도의 차이가 있다.
좀더 직접적으로 대선 주자들의 지지 강도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 지지하고 있는 후보를 내년 대선까지 계속 지지할지 여부를 물었다. 전체 응답자의 55.2%는 “계속 지지할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전 시장 지지층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62.6%로 올라간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76.6%)이나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74.0%)보다는 낮지만, 현 시점에서 실질적 경쟁자인 박 전 대표(56.2%)나 고 전 총리(47.2%)에 비해 높았다. 이 전 시장의 지지층이 상대적으로 탄탄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개방형 설문 방식에서 이름을 콕 찍어 답변한 이들이나 “계속 지지할 것 같다”는 응답자들은, 지지를 철회할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상당 기간 지속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전 시장이 서울의 40대들 사이에서 ‘나 홀로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이 전 시장이 ‘잘했다’. 과거의 정치가 여의도를 중심으로 정치권 내에서 세를 불리는 방식이었다면,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는 패턴이 달라졌다. 자기 나름의 브랜드와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한층 중요해졌다. 자신의 메시지를 공격적으로 마케팅하는 자가 주목받고 살아남는다. 이 전 시장은 현재 거론되는 대선 주자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공격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반도 대운하’ 공약(경부운하를 포함해 다른 지역의 운하까지 개념을 확장하면서 이 전 시장 쪽에서 새로 붙인 이름)이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이 시작되기도 전에 큰 구상이 아닌 구체적인 공약부터 내놓는 대선 주자는 없었다. 한나라당의 경쟁자들은 물론 열린우리당도 ‘건드리면 커질까봐’ 검증과 공격을 주저하던 오랜 시간 동안, 이 전 시장은 혼자 ‘장사’를 잘했다. 이는 청계천이나 대중교통 체계 개편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핵심인 언론의 시선을 당길 줄 알았다.
“정몽준 지지층이 이명박에게”
둘째, 국민들이 정치인의 어떤 점을 보고 지지(혹은 투표)할 것인지 기준도 달라졌다. 이번 조사의 응답자들이 밝힌 특정 후보 지지 이유는 ‘정책 추진 능력(57.4%) → 도덕성과 참신함(26.7%) → 정책과 이념 노선(13.4%)’ 순이었다. 2002년 대선 당시 후보를 고른 기준은 ‘도덕성과 참신함(43.0%) → 정책과 이념 노선(23.7%) → 정책 추진 능력(19.7%) → 소속 정당(12.3%)’ 순이었다고 답했다. 이 전 시장 지지층으로만 좁혀보면 정책 추진 능력 부분이 84.7%까지 올라간다. 이는 이 전 시장의 이념 노선이나 도덕성보다는 능력에 대한 기대가 지지도를 떠받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경제 성장과 추진력이라는, 상품으로 치면 명품 브랜드를 달았다. 명품 브랜드는 단점을 막아주는 방패로도 기능한다. 15대 국회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경력도, '서울 봉헌 발언'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기업을 운영했던 사람이 깨끗하게만 살았겠어?’ 하는 식으로 앞으로 터져나올지도 모를 개인적인 문제에 미리 관대해질 준비까지 하고 있다.
셋째, 이전 대선에서 나타났던 전통적인 대결구도가 무너졌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이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무능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 대표적인 예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했던 응답자의 50.2%가 이 전 시장 지지로 옮겨갔다. 조사를 담당했던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한귀영 연구실장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지지층은 후보 단일화(11월25일) 이전부터 노무현을 지지했던 층과 단일화 이전에는 정몽준을 지지했으나 단일화 이후 노무현 지지로 선회한 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며 “합리적 성향의 보수층인 정몽준 지지층이 현재 이명박 지지층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념 지형상 진보나 보수의 한 축에서 중도를 향해 나아가는 게 일반적인데, 이명박은 중도에서 시작해 높은 지지를 등에 업고 한나라당의 전통 지지층을 공략하고 있는 방식으로 지지도를 높여가는 최초의 사례일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한나라당에 덧씌워진, 수구꼴통, 부패 등 부정적 이미지는 이 전 시장을 별로 구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세론이 내년 대선까지 거침없이 이어질 것으로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결정적인 시기에 날개가 꺾인 과거의 대세론에 비해 탄탄하다고는 하지만, 반전을 거듭해온 이전 ‘대선 드라마’를 보면서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세론은 여권발 정계 개편과 한나라당 경선이라는 두 차례의 고비를 거치면서 그 견고함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이 전 시장이 제시할 비전이다.
역순으로 짚어보면, 이 전 시장의 대표상품인 ‘한반도 대운하’는 그의 이미지를 강화해주기는 하지만 시대정신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명확하게 제시한 적은 없지만, 서울시장 퇴임 이후 수십 차례 진행한 강연에서 이 전 시장이 강조한 것을 모아보면 선진화 혹은 제2의 국운 융성 정도가 될 것 같다. 점수는 유권자가 표로 매긴다.
이명박 경선 통과가 불확실하면?
한나라당 경선은 당심과 민심이 절반씩 섞이는 국민참여경선 방식으로 대선일 6개월 전에 치르도록 돼 있지만 시기와 방식 모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1등을 다투는 박근혜 전 대표가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층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이명박 전 시장은 당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서울의 40대를 상대로 조사한 이번 조사에서도 뚜렷하게 차이가 났다. 지지하는 후보가 소속 정당의 후보로 선출되지 못할 경우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에, 절반이 넘는 62.4%가 정당에 관계없이 그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인물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인물에 관계없이 같은 정당 소속 후보를 택하겠다는 응답자는 23%, 투표를 포기하겠다는 응답자는 13.3%로 나타났다. 특히 이 시장의 지지층은 이 시장이 후보로 선출되지 않을 경우 같은 당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이 19.5%로,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층(34.7%)보다 낮게 나왔다. 이는 이 전 시장이 당내 경선에서 탈락할 경우 그의 지지층이 한나라당을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선 통과가 불확실할 경우 이 전 시장의 중층적인 지지층은 경선 즈음에 다른 선택을 강요할 수도 있다.
여권발 정계 개편은 현재 수준에서는 종잡을 수 없다. 갈등을 빚으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놓고 프로야구식(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코리안시리즈)으로 흩어져 있는 지지층을 통합해나가는 가운데 유력한 대선 주자가 부상하지 않겠느냐는, ‘설’이 설왕설래하고 있는 정도다.
다만 이번 조사에서 범여권이 가질 단 한 가닥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다음 대선 주자를 고르는 유권자의 시선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응답자의 74%가 후보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을 기준으로 투표할 것 같다고 답했다. 현 정부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투표할 것이라는 응답은 24.7%에 불과했다.
반전은 대선의 법칙?
1997·2002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드라마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대선(대통령 선거) 1년은 평년 4년이다. ”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대선을 앞둔 1년 새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경험칙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명제에 딴죽을 거는 이는 없다. 역대 대선은 ‘예상된 드라마’로 끝나지 않았다. 2007년 대선도 그럴까?
경주는 이미 시작됐다. 이명박은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달린다. 그 아래 박근혜와 고건이 20% 안팎에서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정동영·김근태·손학규 등이 5%대 지지율을 밑돌고 있다. 한마디로 이명박 대세론이다. 이대로 가면 이명박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다. 2007년 12월19일까지 지금의 판세가 지속될까?
과거 대선은 이런 의문들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의문을 푸는 실마리 또한 제공한다. 16대 대선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대선을 1년 앞둔 2001년 12월, 이회창 대세론이 정치권을 지배했다. 이회창의 지지율은 2위인 이인제의 곱절이었다. 이회창은 ‘야당 대통령’으로 불렸다. 이듬해 1월 <한국일보〉가 실시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적합한 인물’을 묻는 여론조사에서도 이회창은 31.7%로 부동의 1위를 달렸다. 다음으로 이인제(16.8%), 박근혜(8.3%), 노무현(8.2%) 순이었다.
하지만 대세론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 달 뒤 시작된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에서 ‘노풍’이 불면서다. 한국갤럽이 그해 4월에 실시한 ‘이회창 vs 노무현 가상 대결’에서, 노무현은 49.4%를 얻어 36.3% 지지율에 그친 이회창을 눌렀다. 판세가 뒤집힌 것이다. 90년 정략적인 3당 합당을 반대하고, 총선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불리한 지역구에 출마한 노무현의 비정치적 행보가 기존 정치에 혐오감을 느껴온 유권자들을 열광시켰다.
노풍이 순항한 것도 아니다. 노 후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해 영남공략전에 나서면서 역풍을 맞았다. 실망은 정몽준으로 옮겨가 ‘정풍’을 불러일으켰다.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정몽준 후보가 순식간에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노무현의 대체제가 됐다. 정풍도 그해 11월에 사그라지면서 이회창 후보가 35% 안팎의 지지율로 1강을 형성하고, 뒤이어 노무현과 정몽준이 각각 20% 안팎의 지지율로 힘겹게 추격했다.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는 분열돼서는 도저히 이회창을 누를 수 없다는 현실에 공감하면서, 선거일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1월25일 역사를 바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정몽준의 지지층을 끌어들인 노무현은 12월19일 아침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적 같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15대 대선도 예상치 못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대선 1년 전까지만 해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박찬종 대세론으로 쭉 가는 듯했다. 1997년 1월 <세계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찬종은 27.4%를 얻어 같은 당의 이회창(19%)을 한참이나 앞섰다. 그러나 신한국당의 ‘킹메이커’ 김윤환이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판세는 돌연 이회창 대세론으로 기울었다. 3월부터 줄곧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30% 중반을 넘어 2위인 김대중 후보와 10%포인트 이상의 격차를 유지했다. 이회창 대통령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반전은 또 한 번 찾아왔다. 7월 말 이 후보의 두 아들 병역 문제가 불거지자, 김대중과의 지지율이 역전됐다. 이후 이회창의 지지율은 회복되는 듯했지만,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와 ‘DJP(DJ+JP) 연합’으로 결국 김대중이 청와대로 입성했다.
14대 대선은 대선 직전 15, 16대만큼의 극적인 드라마가 없다. 하지만 장편으로 치면, 극적인 요소가 충분하다. 13대 대선에서 야권 분열로 노태우가 승리했다. 그 뒤 2년이 채 못 돼 김영삼은 야당을 포기하고 민정당·공화당과 몸을 섞는 3당 통합을 추진했다. 정치의 후퇴라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92년 대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반전’이 대선의 법칙은 아니다. 2007년 12월19일까지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대선(대통령 선거) 1년은 평년 4년이다. ”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대선을 앞둔 1년 새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경험칙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명제에 딴죽을 거는 이는 없다. 역대 대선은 ‘예상된 드라마’로 끝나지 않았다. 2007년 대선도 그럴까?
경주는 이미 시작됐다. 이명박은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달린다. 그 아래 박근혜와 고건이 20% 안팎에서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정동영·김근태·손학규 등이 5%대 지지율을 밑돌고 있다. 한마디로 이명박 대세론이다. 이대로 가면 이명박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다. 2007년 12월19일까지 지금의 판세가 지속될까?
과거 대선은 이런 의문들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의문을 푸는 실마리 또한 제공한다. 16대 대선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대선을 1년 앞둔 2001년 12월, 이회창 대세론이 정치권을 지배했다. 이회창의 지지율은 2위인 이인제의 곱절이었다. 이회창은 ‘야당 대통령’으로 불렸다. 이듬해 1월 <한국일보〉가 실시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적합한 인물’을 묻는 여론조사에서도 이회창은 31.7%로 부동의 1위를 달렸다. 다음으로 이인제(16.8%), 박근혜(8.3%), 노무현(8.2%) 순이었다.
하지만 대세론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 달 뒤 시작된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에서 ‘노풍’이 불면서다. 한국갤럽이 그해 4월에 실시한 ‘이회창 vs 노무현 가상 대결’에서, 노무현은 49.4%를 얻어 36.3% 지지율에 그친 이회창을 눌렀다. 판세가 뒤집힌 것이다. 90년 정략적인 3당 합당을 반대하고, 총선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불리한 지역구에 출마한 노무현의 비정치적 행보가 기존 정치에 혐오감을 느껴온 유권자들을 열광시켰다.
노풍이 순항한 것도 아니다. 노 후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해 영남공략전에 나서면서 역풍을 맞았다. 실망은 정몽준으로 옮겨가 ‘정풍’을 불러일으켰다.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정몽준 후보가 순식간에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노무현의 대체제가 됐다. 정풍도 그해 11월에 사그라지면서 이회창 후보가 35% 안팎의 지지율로 1강을 형성하고, 뒤이어 노무현과 정몽준이 각각 20% 안팎의 지지율로 힘겹게 추격했다.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는 분열돼서는 도저히 이회창을 누를 수 없다는 현실에 공감하면서, 선거일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1월25일 역사를 바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정몽준의 지지층을 끌어들인 노무현은 12월19일 아침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적 같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15대 대선도 예상치 못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대선 1년 전까지만 해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박찬종 대세론으로 쭉 가는 듯했다. 1997년 1월 <세계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찬종은 27.4%를 얻어 같은 당의 이회창(19%)을 한참이나 앞섰다. 그러나 신한국당의 ‘킹메이커’ 김윤환이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판세는 돌연 이회창 대세론으로 기울었다. 3월부터 줄곧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30% 중반을 넘어 2위인 김대중 후보와 10%포인트 이상의 격차를 유지했다. 이회창 대통령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반전은 또 한 번 찾아왔다. 7월 말 이 후보의 두 아들 병역 문제가 불거지자, 김대중과의 지지율이 역전됐다. 이후 이회창의 지지율은 회복되는 듯했지만,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와 ‘DJP(DJ+JP) 연합’으로 결국 김대중이 청와대로 입성했다.
14대 대선은 대선 직전 15, 16대만큼의 극적인 드라마가 없다. 하지만 장편으로 치면, 극적인 요소가 충분하다. 13대 대선에서 야권 분열로 노태우가 승리했다. 그 뒤 2년이 채 못 돼 김영삼은 야당을 포기하고 민정당·공화당과 몸을 섞는 3당 통합을 추진했다. 정치의 후퇴라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92년 대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반전’이 대선의 법칙은 아니다. 2007년 12월19일까지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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