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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시사

박정희의 황소, 노무현의 눈물

여행가/허기성 2007. 11. 24. 20:41



한겨레] 문제. 차지철, 백기완, 김두한, 김영삼의 공통점은 □이다.

각자의 이력을 살펴보자. 차지철은 해병대 장교로 5·16쿠데타에 참여한 ‘정치군인’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으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졌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보면 아직도 ‘민중후보’란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오랫동안 통일운동에 헌신했고 1987년과 1992년 대선에 출마했다. 김두한은 전설의 싸움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시대를 대표한 정치인이다. 민주주의는 재미있는 제도이다. 전혀 무관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다. 1967년 6월8일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그 4명의 경우처럼. 이들 모두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차지철은 민주공화당, 김영삼·김두한은 신민당, 백기완은 민주당 공천을 받았다. 이념과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이들 모두 유권자들에게 “나를 뽑아 달라”고 호소했다.

따지고 보면 선거는 일반 마케팅과 다를 바 없다. 판매할 제품은 ‘후보자’이고 판매지역인 시장은 ‘지역구’이다. 판매 대상인 소비자는 ‘유권자’이고 제조업자는 ‘정당’이다. (<선거마케팅전략> 최동만·신강균) ‘대통령 제품 구매일’이 27일 앞으로 다가왔다. “쇼를 하라”는 요새 광고 문구처럼, 여러 ‘제조업체’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해 ‘쇼’를 하고 있다. 라이벌 제품에 대해서 “모양은 좋지만 기능이 떨어진다”거나 “기능은 좋지만 디자인이 좋지 않다”는 헐뜯기도 오고간다. 소비자는 비싸도 좋으니 제발 질 좋은 상품을 사고 싶다. 일반 제품은 환불하거나 교체해주지만, ‘대통령 제품’은 한번 사면 5년 동안 무조건 써야 한다.

광고 문구를 살펴보는 것도 선택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각각의 카피를 보고 상품들을 정확히 떠올렸다면 당신은 1등 소비자. ‘국민성공시대를 열겠습니다’‘차별 없는 성장, 가족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사람중심 진짜 경제’‘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살아 있는 원칙’ …. 가장 멋지게 광고한 제조업체는 어디일까? 어느 상품 광고가 잘됐는지 스스로 점수를 매겨보는 것도 재밌는 놀이. 〈Esc〉가 정치광고의 세계를 살펴봤다.

1948년 정부수립부터 긴 암흑기를 통과해야 했던
정치광고 50년간의 변천사


우리나라에 유권자로부터의 득표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광고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이다. 50∼60년대의 정치광고는 특별한 기법 없이 정책과 이념을 긴 글로 설명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정부수립 당시 1공화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였으므로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광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vs ‘갈아봐야 별수 없다’

2대(1952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3대(1956년), 4대(1960년)까지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국회의원을 뽑았다. 집권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신문에 정치광고를 실었다. 그러나 이 당시 정치광고는 정책과 공약을 장황하게 나열하거나 슬로건이라고 보기 어려운 구호에 불과해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문맹률이 높은 것도 정치광고가 발전하는 데 제약이 됐다. 60년대까지도 문맹률이 높아 작대기 수로 정당과 후보자를 표시했다. 그래서 신문 등 매체를 통한 정치광고보다 장외유세가 발달했다.

대부분의 정치광고가 원시적이었지만 몇몇 슬로건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56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갈아봐야 별수 없다”는 슬로건으로 맞받아쳤다. 민주당 후보 신익희는 유세 도중 숨졌지만, 민중들은 그를 추모해 185만표의 무효표를 던졌다. 야당인 진보당의 조봉암도 216만표를 받아 504만표로 당선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떨게 했다.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와 달리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다. 그는 추상적인 개념어나 구호 대신 “여러분의 명랑한 생활과 보다 편리한 살림을 위해 공화당은 황소처럼 힘차게 일하겠습니다”라고 썼다. 황소에 자신을 빗댄 것이다. 윤보선씨는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뿌리 뽑자”고 맞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 쪽의 민주공화당은 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일관된 슬로건을 내걸었다. 각 지역 후보들은 모두 포스터에 “박 대통령 일하도록 밀어주자 ○○○”라는 동일한 슬로건을 적었다.

1970년대부터 87년까지는 정치광고의 암흑기이다. 선거가 없는데 정치광고가 있을 수 없었다. 71년 선거가 마지막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중시대의 막을 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539만표를 얻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634만표를 얻고 겨우 당선됐지만 더 이상 마음을 놓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이 72년 유신을 선포하면서 각 정파, 정당의 정치활동과 함께 정치광고도 사라졌다. 정부의 선전만 존재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은 유신이나 긴급조치를 선포하는 대신 형식적으로나마 선거를 치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8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공보를 보면, 전 전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소속 기호4번으로 출마했다. 슬로건은 ‘창조·개혁·발전의 새 영도자’. 그는 공보에서 “지난날에는 … 정치의 근대화보다 경제 발전에 치중해오기도 했습니다만, 앞으로 제5공화국에서는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극대화하여 그야말로 국민에 의한 정치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라고 썼다.

본격적인 정치광고는 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 나타났다. 각 캠프마다 광고 전문가와 광고 대행사가 참여했고 각종 광고전략과 다양한 기법들이 동원됐다. 신문·잡지 등 인쇄매체 외에 모자, 조끼, 만화 등 다양한 광고매체가 쓰였다. 또 선거역사상 처음으로 티비 유세가 허용돼, ‘이미지 메이킹’이 중요해졌다. 이런 이미지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가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딱딱한 군인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어린 소녀를 안고 귓속말을 하는 모습을 포스터에 담았다.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슬로건도 ‘위대한 보통사람’으로 정했다. 그러나 87년과 92년 선거는 여전히 지역주의와 민주·반민주의 이념적 대립이 선거를 좌우해 정치광고가 실제로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쪽 홍보부장이던 권신일(이상득 국회부의장 비서관)씨도 “정치광고는 87년에 등장했지만 실제로 선거에 영향을 끼친 것은 97년 대선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실제 선거에 영향 끼친 것은 1997년”

97년과 2002년은 이미지가 선거에 크게 영향을 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 캠프는 당시 유행한 디제이디오시의 ‘디오시와 춤을’을 로고송으로 채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원색의 옷을 입고 개사한 ‘디제이와 춤을’에 맞춰 춤을 췄다. 고령의 김 전 대통령은 순식간에 ‘정신적 청춘’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직접 기타를 치고 눈물을 흘렸다. 2007년엔 어떤 기발한 정치광고가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