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 위 건물주'의 횡포..."상가권리금 받지말고 나가라" 본문
'조물주 위 건물주'의 횡포..."상가권리금 받지말고 나가라"
한 사람이 권리금은 몇 번까지 떼일 수 있을까.
김소라(여·44)씨는 이번이 세번째라고 했다. 처음은 철판볶음밥집이었다. 그는 2002년 서울 마포구 홍대 상권 내 40㎡(12평) 남짓한 가게 자리를 권리금 2900만원을 주고 인수했다. 이 투자비는 5년 뒤 임대차 계약 기간이 끝나자 고스란히 날렸다. 건물 주인이 “권리금은 인정 못한다”며 “보증금 줄테니 그것만 받고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돈 욕심도 참 많다”고 말하는 건물주 앞에서 그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김씨는 그해 서교동 주택가에 다시 빵집을 차렸다. 인테리어 등 시설 투자비만 4500만원이 들었다. 2년 뒤 가게 건물을 사들인 새 건물주의 딸이 빵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최초 60만원이던 월세는 4년 새 150만원으로 2배 넘게 올랐다. 세 부담을 감당못한 그는 2013년 가게 문을 닫았다. 권리금은 또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다고 했다.
지금 운영하는 122㎡(37평)짜리 서교동 카페의 건물주는 이 사연을 다 안다. 김씨의 옛 가게에 와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재계약 과정에서 월세는 두 배로 올랐다. 그는 재차 가게를 내놓았고, 지난해 10월 가까스로 새 임차인을 찾아 권리 계약까지 마쳤다. 문제는 건물주의 변심이었다. 정부가 상가 권리금 보호 방안을 발표한 직후였다. 동생이 가게 자리를 쓰려 한다며 한사코 임대차 계약서를 써주길 거부한 것이다. 시설비 1억 5000만원을 들인 이 카페는 오는 3월 계약이 만료된다. 10년이 넘은 자영업 경력이 김씨에게 남긴 것은 창업 손실 2억 2000여만원이다.
김씨는 호소했다. “예전에는 권리금 못 받고 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가 권리금을 보호한다는 법안이 발표되고 또 제때 처리되지 않는 사이 나 같은 일이 오히려 이 동네에서 너무나 흔한 일이 됐어요.”
김씨 얘기처럼 이건 비단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요즘 상가시장에서 임차인들 아우성이 이만저만 아니다. 정부가 상가 세입자의 권리금(점포 시설비와 영업권 등 자릿값)을 보호한다며 지난해 9월 24일 발표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수개월째 국회에 잠들어 있어서다. 기대감을 부풀렸다가 불확실성만 키운 꼴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오는 24일에야 법안심사1소위원회를 열고 이 법 개정안을 처음으로 심의할 예정이다. 정부 대책이 나온 지 꼭 5개월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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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피일 미뤄지는 법안 처리…불똥은 세입자에지금껏 일정이 미뤄진 것은 여야간 이견 때문이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해 11월 대표 발의한 법안은 정부 대책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세입자 권리금을 법으로 보호하고, 건물주가 이를 방해하면 손해를 배상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건물주에게 이른바 ‘권리금 회수 협력 책임’을 지운 것이다. 건물주가 바뀌어도 임대료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5년간 계약 갱신권도 보장한다. 현재는 서울의 경우 환산 보증금(보증금+월세×100) 4억원 이하만 보호 대상이다.
여기에 같은 시기 야당·시민단체가 보완 법안을 또 내놨다.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다. 기본 골격은 여당 안과 같다. 다만 세입자 보호를 대폭 강화했다. 건물주가 재건축·리모델링으로 세입자를 내보낼 때 보상비를 주도록 하고, 임대차 계약 기간은 10년까지 보장하도록 했다. 계약 갱신권과 임대료 상승 제한(연 9%) 등은 모든 세입자에게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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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법 통과가 늦어지자 불똥이 상가 세입자에게 튀고 있다는 점이다. 건물주들이 임대차 계약 만료를 앞둔 점포의 재계약을 거부하거나 월세를 대폭 올리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권리금 법제화로 임대인 손해가 커질 것을 우려한 결과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10~12월) 기준 서울 마포구 홍대 앞 상권의 상가 임대료는 ㎡당 월 3만 6000원으로 전 분기(㎡당 3만700만원)보다 17% 넘게 올랐다. 99㎡(30평)짜리 점포의 경우 월세가 304만원에서 356만원으로 3개월 새 50만원 이상 급등한 것이다. 용산구 이태원 일대 상가 임대료도 ㎡당 3만 1100원에서 3만 5500원으로 14% 상승했다.
오는 5월 임대차 계약이 끝나는 이성순(여·58)씨는 “매일 피가 마르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명동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는 그는 건물주가 아들이 쓸 목적으로 퇴거를 요구해 초기 투자비 2억 4000만원을 고스란히 날려야할 판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국내 전체 상가 권리금은 총 33조원(평균 2748만원)이다. 이처럼 권리금 피해 우려가 있는 상가 임차인은 약 120만명에 이른다.
정부도 이제 국회만 바라보는 처지다. 국토부 관계자는 “건물주가 권리금 회수를 방해했을 때 손해 배상금을 어떻게 산정할 지 초안을 이미 마련한 상태”라며 “법안 처리만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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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차인 반발 커져…심의 또 밀리면 4월 국회 기다려야사정이 이렇자 야당과 시민단체도 한 발 물러서는 분위기다. 상가 임차인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일단 여당 안을 통과시켜 놓고 이후에 문제점을 보완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법사위 야당 간사인 전해철 의원실 관계자는 “주중에 여론을 다시 들어보고 입장을 정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 개정안이 이번에 법사위 소위 심의를 통과하면 다음달 3일 국회 본회의를 거쳐 3월 말 이전에는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본회의 통과 후 법안의 정부 이송까지 통상 일주일이 걸리고, 정부는 이송한 법안을 15일 안에 공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가 권리금 보호 방안은 개정법 공포 즉시 임대차 계약이 진행 중인 소상인들이 적용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또 다시 심의가 밀리면 4월 임시국회를 거쳐 일러도 5월 중에야 법 시행이 가능하다. 김승종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며 “야당이 주장하는 재건축 상가 세입자에게 보상비를 지급하는 방안 등은 향후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추진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이나 건물주에게 항의 한 번 못하고 가게 문을 닫았던 김소라 씨. 그에게 권리금은 단순 돈이 아닌 그간 가게에 들인 ‘시간과 열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법안이 통과된다 해도 그는 보호 대상에서 비껴날 가능성이 높다. 김씨의 계약 기간이 오는 3월 10일까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자 그는 “이번에 권리금을 받으면 직원들과 여행을 다녀오려 했는데…”라며 탁자 밑으로 얼굴을 푹 떨궜다. “비록 우리가 보호받지 못하더라도 법 통과를 위해 힘쓰려해요. 누구에게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는 주어져야 합니다.” 고개 든 김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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