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을 내 돈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라? ‘부자들의 절세법’
연초부터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연말 정산’이었다. ‘13월의 보너스’로 인식됐던 연말정산이 ‘13월의 세금’이 되는 순간, 샐러리맨들의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음에도 정부 당국과 정치권은 손을 놓고 있다가 부랴부랴 샐러리맨들의 성난 조세 감정을 달래느라 긴급 수습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세금은 국민의 의무 중 하나다. 중고교 교과서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같은 분이 여전히 존경받으며, 기업인의 표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 중에서 세금을 제대로 내기 위해 노력한 기업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과거 독재정권 치하에서 정권에 강제로 뒷돈을 대줄 수밖에 없던 현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금에 특히 민감한 계층은 부유층이다. 자신들이 번 돈에 대해 고율의 세금이 매겨지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부유층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일부이긴 하지만 세금을 피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개발된다.
돈은 그 본성상 세금을 싫어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세금은 사람들의 기피대상이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CD(양도성예금증서)나 미국 달러가 탈세 수단으로 많이 활용됐다. CD의 정식 명칭은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 무기명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름을 적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CD를 현물로 인출해서 사채시장 등을 통해 자금을 세탁하는 일이 일부 기업이나 부유층에선 흔한 일이었다. 정치자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CD는 항상 등장했다.
금융거래에 이름표가 붙기 시작한 것은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면서부터다.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도입되기 전에도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경제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이유로 상당 기간 논의만 이뤄졌다. 그러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전격적으로 금융실명 거래 및 비밀보장에 대한 대통령 긴급 재정 경제명령’이 발표되면서 이 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나 이때에도 피해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졌는데, 다른 사람 명의의 통장을 이용하는 차명 거래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통장을 만들 때는 그 당사자가 가서 만들어야 하지만 그 만들어진 통장을 다른 사람들이 이용(?)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금융실명제법 도입 후 몇 년 뒤인 1997년 말에 외환위기가 발발하자 금융실명제 폐기 혹은 한시적 중지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자금 시장이 경색되어 있으니 지하에 숨겨진 돈을 나오게 해서 경제에 수혈하자는 주장이었다. 물론 그 주장을 앞서서 한 곳은 대기업들이었다.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꽁꽁 숨은 돈을 끌어내기 위해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수단을 만들어 주었는데, 소위 ‘묻지마 채권’이라고 불리는 무기명 채권이다. 이 채권은 1998년에 약 3조 원이 발행되었다. 쉽게 말해 경제 위기 덕분에 3조 원이라는 지하의 돈이 합법적으로 신분을 회복하고 세금을 내지 않게 된 것이다. 한 때 만기가 얼마 남지 않는 무기명 채권은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기도 했다. 서울 명동의 사채시장에는 무기명 채권을 구해달라는 기업이나 개인들도 적지 않았었다.
최근에 금에 대한 투자가 늘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도 2014년에 차명거래 금지법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법 아래에서도 차명계좌가 적발되더라도 세금만 내면 됐지만 이제는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는 모든 돈에 주인이 있어야 하고, 그 주인은 당연히 세금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세금 갈등의 시대, 이제 시작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자민 플랭클린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보면, 세금을 피하기 위한 갖은 노력이 있어 왔다. 가장 유명한 세금 중 하나가 바로 ‘창문세‘이다. 1696년 영국의 윌리엄 3세는 창문 개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는데,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창문이 없는 집을 짓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인 포트르 대제도 귀족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수염세를 부과했다. 왕의 강권에도 버텼던 귀족들이 해마다 100루불의 수염세에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고 한다.
현대 사회에서 세금은 복지 및 사회 인프라에 대한 공동 구매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공동으로 의료보험을 구매하는 게 국민건강보험이고, 연금을 사는 게 국민연금이다. 세금은 고속도로나 공항 등 인프라의 건설의 재원이기도 하다. 세금이 없으면, 이런 인프라는 건설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인프라가 없으면 삶은 매우 불편해 질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복지와 증세에 관한 대대적인 논의와 갈등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성장에 고령화가 진척됨에 따라 정부의 주머니 사정은 좋아지기 어렵다. 정치권은 대개 저항이 적고 손쉬운 세금부터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닥칠 것이다. 조세감정에 대한 디테일한 대응이 없으면, 세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심화될 지도 모른다.
자산관리에 있어서 세금은 제1의 이슈가 될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자산 로케이션(Asset Location)’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자산 로케이션을 자산운용을 할 때, 먼저 세제 혜택이 주어지는 계좌나 상품으로 운용하고, 그 안에서 자산 배분하라는 것이다. 이제 한국도 저금리와 고령화로 자산 로케이션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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