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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주안→아현... 우리는 '재개발 인간'이었다

여행가/허기성 2016. 1. 19. 09:47

부천→주안→아현... 우리는 '재개발 인간'이었다

20대 말의 '집', 그리고 '방' 이야기

전역 후 동생과 나는 부천에서 살았다. 전세 3천, 일반 주택의 2층 일부를 막아 만든 7~8평짜리 방이었다. 부천역을 나와 90년대를 주름잡았을 것 같은 유흥가를 지나서 언덕배기를 올라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있었다. 겨울에도 온수 외에는 난방을 하지 않고 장판을 켰기 때문에 추웠고, 여름엔 바람이 통하지 않아 많이, 정말 많이 더웠다.

겨울에야 집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로 난방을 해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여름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바깥보다 평균 4~5도가 높은 집에서 선풍기에 의지해 두 번의 여름을 보내고, 다음 집은 반드시 바람이 통하는 집을 가겠노라 생각했다.

바람이 통했다, 여름이 아닌 겨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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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 신학기 개강을 앞두고 대학가에 방 구하기가 한창인 가운데 대전 유성구 충남대학교 외벽에 원룸·하숙 세입자를 구하는 전단이 빼곡히 붙어 있다.

 


부천에서 세 번째 겨울의 문턱에 우리는 인천으로 이사했다. 주안역에서 걸어서 15분가량 걸리는 주안초등학교 인근의 주택가, 전세 4천이었다. 사실 말이 주택가지, 6차선 도로에 거의 인접해 있는 상가건물의 2층이었다. 이번엔 집이 넓었다. 30평이라고 했나? 그런데 매우 비효율적인 구조의 집이었다.

방이 세 개라고는 했지만 어중간한 크기의 방 두 개와 주방 옆에 딸린 통로 같은 방이 있었다. 두 개의 방은 사이즈가 고만고만 했으므로 둘이 같이 있기엔 적당하지 않았고, 우린 결국 거실에 나와 살았다.

이사 오기 전의 소망대로 바람이 잘 통했다. 여름 말고 겨울에. 정말 추웠다. 상가 구조를 가진 단독주택이라 아래위로 덥혀주는 작용도 없었고, 콘크리트 구조는 쉽게 냉기를 빨아들였다. 온종일 냉동실에 있는 셈이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비효율적인 구조에도 불구하고 이 집은 여전히 컸기 때문에 28만 원짜리 가스 요금 통지서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많이 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맞춰놓은 보일러의 실내 온도는 13도였으니까. 후 불면 입김이 나는 실내 온도에서 살고 있으니 온수라도 잘 나왔어야 하는데,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물이 뿜어져 나오는 샤워기에 화들짝 놀라기를 몇 차례 반복한 후, 우리는 겨울의 한기가 사라질 때까지 집에서 샤워하기를 포기했다. 샤워를 할 수 있는 집에도, 동네 목욕탕에 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받은 28만 원짜리 가스 요금 명세서.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집을 네 채 갖고 있고 자기 자랑 하기를 좋아하는 부동산 아저씨는 우리가 많이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별일 아니었다. 12월 13일에 입주한 우리는 이사 온 날 가스와 전기의 계량기를 찍어놓지 않은 탓에 잘난 아저씨의 철없는 아들이 쓰다 간 요금까지 물어야 했을 뿐이다. (후기를 붙이자면, 동생은 지난달 7만8800원짜리 가스 요금 통지서를 받았다.)

'헬-아현'의 셰어하우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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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아현동 아현역 4번 출구로 나와 시장을 빠져나오면 북아현동의 주택가로 들어갈 수 있다. 북아현동의 주택가에서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의미의 빨간 깃발을 달아 놓은 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 번의 독감과 두 번의 가스 요금 통지서를 넘긴 후에 대학원의 세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700만 원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학비를 납부하고서도 그다지 현실감은 없었다. 내 눈앞에 찍히는 숫자는 이자지, 원금이 아니니까. 졸업논문을 위한 세미나가 포함된 학기였지만 수업은 더 많이 듣게 됐다. 당연히 학교에서의 시간이 길어졌다.

부천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이었던 통학 거리는 인천에서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을 잡아야 하게 되었다. 길바닥에서 매일 네 시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엉덩이 싸움을 벌이는 대학원생의 생활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연달아 밤샘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결국 5월 말, 나는 인천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아현동의 셰어하우스에 입주했다.

두 달 치의 월세를 보증금으로 하는 18만 원짜리 방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은 2층 침대의 공간과 옷을 걸 행거, 룸메이트와 함께 쓸 책상이었다. 그 외에는 거실의 TV와 테이블, 욕실 정도가 있었다. 셰어하우스는 정 붙이기가 꽤 어려웠지만, 가을이 넘어가면서 고장 난 보일러 사건을 계기로 멤버들이 뭉치게 됐다.

재개발 지역이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재개발이 무산됐다는 카더라를 곱씹으며 멤버들은 스스로를 '헬-아현'의 주민으로 정의했고, '헬-아현'의 모든 어두컴컴한 상황을 '웃음 8, 냉소 1, 자조 1'의 비율로 갈아 마셨다. 몇 년 뒤에는 이곳을 탈출하는 성공을 맛보자며, 우리보다 높은 곳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헤븐-푸르지오'를 찬양하고, 각자의 상황을 안주 삼아 농반진반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종종 이어지는 '헬-아현'의 주민 회합이 끝나고 각자 불이 꺼진 방에 들어가면,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전라도 말씨의 옆집 노부부를 길동무 삼아 꿈을 꾸러 떠났다.

'집에서의 삶' 대신 '방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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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전세매물 분포도. 지난해 2월 말 ~ 3월 초, 전세보증금 3000만 원 이상의 서울시 5평(16.5㎡) 원룸 전세 매물 분포도. 색깔이 짙은 동네에 매물이 많다는 의미다.

 


이제 동생과 나는 수도권에서의 네 번째 집을 구하고 있다. 피터팬 카페(방 구하기 카페)와 동네 부동산 정도밖에 몰랐던 이전과 달리, 최근 들어 많아진 부동산 중개 앱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집 쇼핑'은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어서, 이런저런 집을 구경하며 더 좋은 집을 고르는 노하우를 축적하는 중이다. 또, 인천을 마지막으로 전세를 포기했다. 전세를 구하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서울로의 진입을 시도하면서 우리가 꿈꾸는 조건들과 전세금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저 월세의 가이드라인을 정해 가능한 한 그 안에서 최선을 택할 뿐이다.

감당 가능해 보이는 가격을 참고해 방을 구경하다 보면 사소한 절망도 쌓여간다. 우리의 조건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애초부터 서울 도심으로의 진입이란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1인 가구, 그중에서도 취업준비생과 사회초년생, 즉 '집에서의 삶' 대신 '방에서의 삶'을 강요받는 이들을 위한 곳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주요 대학 인근과 신림, 봉천 등을 아우르는 고시촌, 영등포와 신길의 중국어 간판이 빽빽한 어느 외국까지. 방이란 그저 머리를 누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 이상의 모든 삶은 문 바깥에 위탁한다.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공원의 벤치 말고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문 바깥말이다. 문 바깥의 삶을 외면하더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은 머리 누일 공간을 위해 매달 30에서 40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갖춰진 5~7평의 원룸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말이란, 매일 누적되는 내일에 대한 피로감과 아직 포기하지 못한 희망 어디쯤에 위치한 주문 같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이 좀 더 많이 남아있는 건 아마도 동생과 내가 두 사람 몫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 몫의 희망을 합치는 것은 포기를 늦추는 효과가 있다. 그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인지 아닌지는 제쳐놓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두 사람 이상이 같이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에서의 삶'을 선택하면 도심에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야만 한다. 만약 여전히 도심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집이 얼마나 돈을 우습게 만드는지 느끼게 된다. 멀지도 않은 오늘(16일) 낮의 일이었다.

우리는 재개발 인간일 수밖에 없을까

영등포와 신길 중간에 위치한 집은 애초에 보려 했던 집이 아니었다. 보려고 찾아갔던 집이 조금 전 팔렸기 때문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옆 중개사를 찾아갔다가 보게 된 곳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소 영등포지회의 협회장을 맡고 있는 업자 아줌마는 주인에게 잘 이야기해 조건을 맞춰주겠다고 했다.

보증금 3000과 월세 30을 최대치로 이야기한 우리는 이미 패를 내보였으므로 잠자코 길을 따라 들어갔다. 좁은 골목의 3층 건물엔 반지층과 2층, 3층이 열을 지어 초라했다. '반지층은 아니겠지'란 알량한 기대가 충족된 다음 순간 2층의 문이 열렸고, 정면에 보인 것은 한 눈에도 낡은 싱크대였다.

설거지할 공간 하나, 그릇을 놓을 곳 하나. 기린마냥 목이 뻗은 스테인리스 수도꼭지에는 냉수와 온수가 나누어진 손잡이의 빨간색, 파란색이 흐릿했다. 오른쪽에 위치한 작은 방은 양팔을 벌린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세탁기와 냉장고를 여기에 놔야 한다고 했다. 왼쪽의 큰 방은 3.5x3m쯤 돼 보였지만 골방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공실이 된 지 오래됐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창가에 달린 작은 테라스의 창문이 깨져 있었다. 그 와중에 광주 출신의 살가운 아줌마는 우리의 조건을 맞춰주겠다는 의미로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여기 전세 7000이야."

돈은 참 우스운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 방의 후줄근함을 수긍했지만, 전세 7000에는 수긍하지 못했다. 수긍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영등포 공원의 잘 닦인 우레탄 도로를 걸어 내려오며 깊은 데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한 소득이 있었다는 한숨이었다.

서울의 주소지를 탐하는 한, 우리는 계속 재개발 인간일 수밖에 없다, 뭐 그런 소득. 부천도, 인천도, 그리고 나만 살았던 아현도 모두 재개발 지역에 속하는 곳이었다.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가용 자산이 우리를 재개발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우리는 또 떠날 것이 분명한 곳에 자리를 잡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집에서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비단 '1인분의 삶'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곳에 머물러 살고자 하는 정주의식이 유물이 되어버린 시대에, '집에서의 삶'을 그리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

"재개발 인간인 주제에" 영등포의 부동산에 걸려 있던 재개발 지구의 지도가 비웃었다.

지도에 대고 속으로 물었다. 재개발 인간들은 이곳을 떠나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재개발된 다른 지역들의 재개발 인간들, 주변부의 인간들, 잉여 인간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지.

안전장치를 얻어본 적 없는 사람들,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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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3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신규 전세대출 확대안을 비판 및 제대로 된 전월세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서 제윤경 금융정의 연대 상임이사(사진 왼쪽부터)와 최창우 전국세입자협회 공동대표, 이선근 민생연대 대표를 비롯한 회원들이 치솟는 전월세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사소한 절망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큼은 무서웠다. 동생과 내가 생각보다 훨씬 나은 처지의 인간들이라는 점이었다. 부천 전세의 3000만 원과 주안 전세의 4000만 원, 아현동의 보증금 36만 원은 우리의 돈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여전히 부모님이라는 쿠션이 있었다. 경기도와 인천, 서울에서의 연착륙을 가능하게 한 것도, 현재 나의 처지를 떠올릴 여유를 만들어준 것도 부모님의 전세금이었다.

맨땅에 헤딩을 하기 전에 필요한 건 헤딩 때문에 뇌진탕으로 실려 가지 않게 해 줄 안전의 보장이다. 젊은 시절의 헤딩이 목숨을 담보로 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생과 내가 개중에 나은 처지라는 말은, 지금도 목숨을 담보로 헤딩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사정이 좀 나은 사람이니 자족할 것이다' 같은 시시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모두의 목숨값이 저렴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젊으니까 쉽사리 맨땅에 헤딩하란 말이 주워섬겨지는 세상에서, 공허한 진심이 덕지덕지 붙은 언어의 위로들이 제각기 누군가의 배를 불리는 세상에서, 안전장치를 얻어본 적 없는 재개발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을 따름이다. '헬-'에서의 탈출을 가장 많이 입에 담지만, 동시에 그 탈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잉여 인간들은 이제 또 어디로 사라져야 하는지 묻고 싶을 따름이다.